보은의지명

HOME > 향토사료집 > 보은의지명

보은읍(報恩邑)

학림리(鶴林里)

1. 위치

면적 2.51㎢, 인구 110가구 294명(1999년말), 본읍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종곡리(鍾谷里), 서는 산성리(山城里), 남은 중동(中東), 신함리(新含里), 북은 산외면(山椳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산내면의 지역으로서, 함림산성(含林山城) 밑이 되므로 함림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함림(內含林), 외함림(外含林), 율지리(栗枝里), 산외면의 대암리(大岩里)를 병합하여 학림리라 해서 보은읍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고무실(熊室) : 평지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새마을 뒤쪽이 됨. 옛날 이곳에 큰 곰이 살았다고 함.
  • 대바위(大岩) : 학림 북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가든 터 마을
  • 밤개울 : 고무실 동쪽 마을로 큰 산 밑이 됨
  • 새동네 : 새집말과 윗대바우 사이에 있었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모두가 논으로 변했음.
  • 새집말 : 학림리중심이 되는 마을 1리에 살던 사람이 이곳에 새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새집말이라고 함.
  • 신작로말 : 새집말 앞도로에 있는 마을. 1974년 도로 확장시 철거되고 현재 6호가 살고있으나 주유소가 생기고 가든이 생겼으며, 학림농원도 조성되었다.
  • 잠실 : 새말 앞 도로 건너편에 있던 마을 터로 물레방아도 있었고, 학림역도 있었으나 지금은 논이 되었음.
  • 평지말 : 새집말과 고무실 사이에 있는 마을로 벌판에 있어 평지말이라 함.
  • 학림(鶴林) : 옛날에 소나무 숲이 많이 우거졌는데 그곳에 두루미가 많이 날아와 살았으나 지금은 두루미가 나타나지 않음.

4. 기타지명

  • 광대마을 : 밤개울 뒤에 있는 산
  • 구룡티(九龍峙) : 수철령 서북쪽에 있는 고개에 아홉 마리의 용이 놀았다고 함.
  • 구조논 : 성깔 들 옆으로 경지정리시 성깔들에 흡수 되었음.
  • 넘은밤개울 : 밤개울에서 고무실로 넘어가는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터 지금도 땅을 파면 부엌자리가 나오고 있음.
  • 덕고개 : 밤개울에서 종곡리 북실로 넘어가는 고개
  • 무네미고개 : 새동네에서 산외면 아시리로 넘어가는 고개
  • 무네미산 : 새마을 뒤쪽 산으로 봉화대가 있었다 하며, 정상에 올라가보면, 보은읍 산외면, 내북면이 눈아래 보이며, 전설에 의하면 홍수때 물이 산을 넘었다고 한다.
  • 밀개산 : 세말 앞산으로 산 형체가 밀개처럼 생겼음.
  • 반공충혼비 : 윗대바위 현재 대바위가든 옆에 세워진 충혼탑임. 1945-1954년 사이에 우리고장에서 공비토벌시 전몰한 김상훈 외 37명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8월 22일 한국반공연맹 보은지구청년회에서 세웠고 해마다 기념식 및 제를 올리고 있다.
  • 북바위: 학림 동쪽 종곡리 수철령으로 넘어가는 문암산(해발 515m) 능선 길옆에 있는 바위
  • 성갈들 : 평지말 앞에 있는 논으로 물을 대다가 잠깐 집에 갔다 오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자기논에 물 때문에 물꼬 옆에 있어야 한다고 해서 ‘성갈들’이라 함.
  • 옥박골 : 새마을과 새집말 사이에 동쪽으로 난 골짜기
  • 온천샘 : 새집말 북쪽에 있는 너덜, 옛날에는 온천이었으나 나병환자들이 몰려들어와 마을에서 메웠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 웃대바우 : 새집말 북쪼에 있는 너덜. 전에는 20호의 마을이었고 이곳에 옹기점이 있었으며, 한때 호황이기도하였으나 6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도로 확장으로 전부 이주 되었고,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음.
  • 윗대바위보 : 윗대바위 보청천을 막아 보를 만들었고 이 물을 이용하여 성깔래 들을 비롯하여 하동안이 들까지 물을 대어 대풍을 기약하고 있다.
  • 절날맹이고개 : 밤개울에서 내속리면 북암리 샛강터로 넘어가는 고개
  • 절터 : 지금의 대바위 가득 뒤에 있던 절터는 없어졌으나 암자를 지키던 선대가 돌아가시자 암자마저 없어지고 세월이 흘러 그의 후손 가운데 손녀가 스님이 되어 현재 L.A 금강사 주지 스님이 되었다.
  • 함림역(含林驛) : 보은현에서 북쪽으로 십리 길 함림산성 밑에 있던 역으로 충암 김정(김정)이 순창군수로 재임할 때, 이웃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더불어 중종왕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하였고, 명분에 어긋나는 상소를 하다가 이곳 보은 함림역에 유배되었다. 조선시대 대마(大馬) 2필 기마(騎馬) 3필, 복마(卜馬) 5필을 두었고, 역리 30명과 종 40명이 머물러 있었다. 청주 율봉역(栗峰驛) 찰방의 소속이었다.
  • 화산(火山) : 새터말 뒤에 있는 산으로 따뜻하여 근동에서 제일 먼저 나뭇잎이 피고 따뜻하다하여 붙여진 이름

5. 전설

  • 북바우
    삼국시대 때 보은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싸움이 잦은 고을이었다. 삼년산성을 근거지로 한 신라군과 노고성에 진을 친 백제군 사이에는 국토확장을 위해서 싸움이 잦았다. 양군은 두 산성 사이에 펼쳐진 중동들과 풍취들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승부를 가릴 수 없으면 제각기 본진으로 돌아가곤했다. 그때 일이다. 백제군의 지휘자는 양서(亮敍)라는 기골이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싸움만 하면 이상하게도 신라군에 패하기만 했다. 어느 날 장군은 새벽부터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노고성을 나섰다. 생사를 건 일전으로 신라군을 크게 무찌르기 위해 며칠을 검토한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그 작전은 신라군을 기습하여 삼년산성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백제군에 배신자가 있어 양서장군의 전략이 사전에 신라군에 알려져 백제군이 성을 나서서 새벽 안개를 뚫고 삼년산성을 향해 노도같이 달려가다 중도에서 숨어 있던 신라군에게 오히려 기습을 당했다. 양서장군이 앞장 서 군사들에게 독전했지만 사기를 잃은 백제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기에 바빴다. 양서장군은 어쩔 수 없이 만신창이가 된 부하 패장병을 이끌고 노고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산성 밑에 이르렀을 때 이미 산성은 신라군에게 점령되었고 장군과 백제군은 갈곳조차 없이 되었다. 양서장군은 어찌할 도리가없어 노고성에 마주 바라다 보이는 문암산(門岩山)으로 쫓겨 들어가게 되었다. 승리에 도취된 신라군들은 추격을 단념하고 만세를 부르며 노고성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양서장군은 갑자기 피곤이 왔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상에 그토록 만사가 풀리지 않고 막히기만 하는 자신의 불운함이 억울하고 한스럽기만 했다. 그는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울분을 발산할 양으로 허리에 찬 긴 칼을 뽑아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향하여 힘껏 찔렀다. 칼은 자루가 있는 데까지 깊이 바위를 찔러 들어갔다. 양서장군은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아 그대로 10여번이나 칼을 돌려대는 바람에 바위에는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그때였다 바위 구명에서 은은하게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고 난데없는 북소리에 군사들은 일제히 쉬고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북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마치 진군을 독촉하는 듯 들리었다. 패전에 사기가 꺽였던 군사들은 북소리에 대오를 맞춰 힘차게 함성을 울리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라군을 크게 물리치고 노고성을 탈환하였다고 한다. 그런일이 있은 후부터 이 바위를 “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며 지금도나무꾼들이 막대기나 손으루 두들기면 북소리가 들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