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읍(報恩邑)
성족리(聲足里)
1. 위치
면적 2.97㎢, 인구 39가구 116명(1999년말). 본읍의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내속리면(內俗離面), 서는 강신리(江新里), 남은 누청리(摟淸里), 북은 종곡리(鍾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소라리 또는 송촌(松村)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성족(聲足)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인리(白忍里)를병합하여 성족리라 하고 보은읍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백인(百忍)말 : 소라리 남쪽에 있는 마을. 백 번 참는다는 뜻으로 지방의 학자들이 충암선생의 강당에서 교훈삼던 말이 마을 이름이 됨
- 성족리(聲足里) : 처음에는 소라리 송촌이라 불러왔으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왔다가 훌륭한 충암선생이 태어난 곳이라 대현지후가성족(大賢之後家聲足)이라 해서 성족이 됨.
- 소라리(松村) : 성족리의 다른 이름으로 성족이라 부르기 전 소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4. 기타지명
- 가마실들 : 소라리 서남쪽에 있는 들. 옛날 이곳에 가마를 타고 가던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종종 있어 가마실들이라 칭함.
- 갑봉(甲峰) : 소라리 동쪽에 있는 산. 부락에서 볼 때 갑방(甲方)에 있다 함.
- 강당(講党) : 충암 김정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백인말에 위치함.
- 굴바우 : 굴바우골에 있는 바위로 큰바위 밑에 굴이 있음.
- 데릉골 : 소라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큰 묘가 있어 대능골이라던 것이 변함
- 성족 명천(名泉) : 보은읍 성족리 속칭 ‘소라리’ 부락에서 조선 중종때 명신 충암 심정선생의 비각이 있고 비각뒤에 우물이 있다. 선생의 어머니 김해 허(許)씨가 1485년 성종 16년 5월에 선생을 잉태하고 있을 때 손수 판 우물이라 한다. 유명한 일화로는 나라가 평화롭고 살기 좋을때는 물이 맑고 물맛이 좋으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물이 나오지 않거나 더러워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신비스렁 일화였다.
- 승지골 : 갑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나무들이 경치가 좋아 승지(賸地)골이라 함.
- 작은장바우고개 : 소라리에서 내속리면 중판리안턱골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김장암이라는 선비가 벼슬을 버리고 수양차 머물던 곳이라 함.
- 장구봉 : 소라리 서남쪼에 있는 산으로 산혈이 장구처럼 생겼음.
- 장바우골 : 소라리 동북쪽에 있는 골로 장바우 고개로 가는 골.
- 황산날골 : 소라리 동북쪽 갑봉 옆 골짜기.
5. 문화유적
- 성운묘소 및 묘갈(成運墓所 -墓碣)
성족리 산35번지 속칭 가마실이 있는 대곡 성운(大谷 成運)의 묘소와 묘갈로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 70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묘소는 서남향(西南向:丑坐坤向)이며, 봉분 둘레 22.7m, 높이 2m로 비교적 크며 묘앞에 높이 1.27m, 너비 60cm, 두께 19cm의 그의 당질인 우계성혼(牛溪 成渾)이 짓고 쓴 묘표비(墓表碑)가 있는데 중훈대부수사재감정성공지묘(中訓大夫守司宰監正成公之墓)라 크게 쓰고 옆에 작은 글씨로 숙인경주김씨부장(淑人慶州金氏祔葬)이라 음각되어 있다. 1585년(선조18)에 세운 것이다. 묘소에서 150m 떨어진 길옆에 그의 묘갈비가 있는데, 비명은 좌승지대곡성선생묘갈명(左承旨大谷成先生墓碣銘)이라고 전서로 음각되어 있고, 비문은 우암 송시열(优庵 宋時烈)이 짓고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쓰고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이 전한 것으로 1663년(현종 4)에 세운 비로 비각(碑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 김정 유허비(金淨 遺墟碑)
성족리에 있으며, 조선 중종(李朝 中宗)때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충암의 유허비, 비명은 충암 김선생유허비(沖庵 金先生遺墟碑)이고 비문은 찬성 송환기(贊成 宋煥箕)가 지었다고 함. 조선 순조(朝鮮 純祖)때 세움.
- 석천암(石泉庵)
성족리에 있는 경주 김씨 중종소유의 비지정 문화재. 조선 중종(朝鮮 中宗)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입고 사사된 명현(名賢) 충암이 학문을 닦고 가르치던 곳이다.
- 영해박씨 열녀문(寧海朴氏 烈女門)
성족리에 있는 달성인 서호순(徐鎬淳)의 처 영해박씨의 정렬을 기리기 위하여 1884년에 세운 정문 영해 박씨는 15세에 출가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자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늙은 시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도리라고 결심하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기를 10여 년, 어느날 밤중에 도적이 들어와 강폭을 노리는 지라 간신히 피하여 위기를 모면했으나,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식음을 전폐하여 10일만에 죽고 말았다.
- 김가기묘(金可幾墓)
조선 선조때 노성현감(魯城縣監) 경주인(慶州人) 김가기(金可幾)와 그의 부인 전주유씨(全州柳氏)가 안장된 묘로 대곡 성운(大谷 成運)묘 아래에 있다. 그는 정유재란시 맨손으로 왜적과 대항하다 순국하였으며 부인 유씨는 남편을 엄호하려다 동시에 순절하여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과 숙부인(淑夫人)으로 증직(贈職)되었다.
그의 묘 동남쪽 200m 지점에는 역시 정유재란시 왜적을 칼로 죽이고 적의 손에 더렵혀진 자신의 유방을 도려내고 순절하여 의열(義烈)이라 명정된 그의 자부 증정부인(贈貞夫人) 고령신씨(高靈申氏)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