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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산신제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 :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 있는데 그 신(神)이 매년 10월 범날에 법주사(法住寺)로 내려오면 산중사람들이 음악을 베풀어 신을 맞이하여 제사하고 40일 동안 머물게 한 뒤에 돌려보낸다 하여 속리산 대자재천왕사의 위치와 제일 (祭日)과 제의(祭儀)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대자재천왕사는 대자재천왕을 모신 신당을 뜻하고 있는데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이란 신은 인도불교의 외도에서 신체로 섬기는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규태(李圭泰)는, 대자재천신(大自在天神)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이 시바(siva)신의 신사(神祠)는 한말 때까지 속리산 법주사에 남아 있었다. 불교에 묻어 등 시바의 성신숭배(性神崇拜)가 한국에 토착화하여 부근숭배(付根崇拜)가 된 케이스이다
하여 인도 시바(siva)敎의 주신인 대자재가 우리나라에 불교와 함께 들어와서 속리산에 토착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자재(大自在)’란 말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들어온 것만은 확실하지만, 우리나라의 성기신앙은 인도의 대자재에서 전래된 것은 아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우리나라에도 선사시대부터 성기신앙이 있었으며 사람이 여자의 성기에서 태어나는 신비와 외경에서 여근을 생명의 근원으로 신성시하면서 주술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신격화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속리산에 있었다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를 우리나라 고유의 성신(性神)을 모신 사당으로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성신앙은 옛날부터 있어도 남근은 거의가 주술적 또는 공물로 바쳐진 것이지 그것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는 속리산신사(俗離山神祠) 또는 속리산천왕사(俗離山天王祠)의 잘못된 표기이다. 그리고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가 있었다는 속리산 봉우리는 속리산의 아홉 봉우리 중에도 천황봉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천황봉이 속리산의 주봉일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산중사람들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황봉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복천암(福泉庵)의 동쪽을 내산(內山)이라 하고 법주사(法住寺)의 위쪽을 외산(外山)이라 한다. 내산에는 돌이 많고 흙이 적으며 외산에는 흙이 많고 돌이 적다. 그리고 내산에서 뛰어난 산은 비로봉(毘盧峰)과 천왕봉(天王峰)이고 외산에서 우뚝한 것은 문장대(文藏臺)다.
하여 ‘천왕봉’이라 하였고 이 밖에도 조식(曺植)의 시나, “請着千石鐘 非大叩無聲 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 허훈(許薰)의 시 “天王北踞星長拱 世祖南巡草木知” 에서도 모두 ‘천왕봉’이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천황봉은 천왕봉에서 변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천왕(天王)’이란 말은 우리나라 민간에서는 천신이 하강하여 지상에 군림하면 ‘천왕’이라 하였고, 또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온 천신 즉 산신도 흔히 천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속리산 천왕봉은 ‘산신이 있는 봉우리’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속리산 천왕봉에도 속리산신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그 이름은 ‘속리산천왕사’이었을 가능성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