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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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報恩邑)

산성리(山城里)

1. 위치

면적 2.9㎢, 인구 138가구 428명(1999년말). 보은읍 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학림리(鶴林里), 서는 장속리(獐俗里), 남은 강산리(江山里)와 교사리(校士里), 북은 내북면(內北面) 서지리(西枝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내북면의 지역으로 산성(山城)밑이 되므로 산성리, 잣미(栢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이목리(九二目里)와 송정리(松亭里)를 병합하여 내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산성1리(구이목, 송정)와 산성2리(잣미)로 나뉘어 보은읍으로 편입되었음.


3. 자연마을

  • 구이목(銅項마을) : 구이목, 안구이목, 노루목, 불목, 절목, 큰목, 가장목, 난대목, 서낭목 등 9개가 있어 구이목이라고도 하며 구이목과 노루목의 2개와 이 마을에 골짜기 9개가 있어 구이목(九二目)이라고 한다.
  • 송정(松亭) : 구이목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상주 황(黃)씨 집성촌이었다. 해방 전부터 50년간 잠종제조업으로 각광을 받던 황로관 씨의 본향이다. 동편으론 잠두혈인 산언덕에는 수백년 된 노송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아랫말 : 마을 중앙을 가르는 골짜기 물을 중심으로 남쪽을 아랫말이라고 하고, 북쪽을 윗말이라고도 하며, 노고산성 밑에 곳을 상촌 논밑에 있다 하여 논밑이라고 한다.
  • 잣미(栢峰) : 잣나무가 아름들이 나무들이 있었다고 전하며 잣나무로 홈을 파서 맞춘 마루(백인마루)가 60년대까지 보전되었으나 새마을 운동으로 헐리고 말았다. 본군에서 제일 먼저 새마을 운동에 불을 부쳤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선도마을이다. 특이한 사업으로 촉성재배를 시작한 것은 최기환이란 청년이 비닐하우스 재배법을 보급시키면서 농가소득증대사업에 눈을 돌리면서부터 새마을 운동은 이미 잣미마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잣미란 원래가 잣뫼였으나 구개음화로 되어 ‘잣미’가 된 듯하다.

4. 기타지명

  • 거먹바위 : 산성리 1리에 있는 바위로 검다고 하여 거먹바위라고 함.
  • 난대골 : 구이목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 노루목 : 구리목에서 장속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노루목처럼 길게뻗쳤다고 함.
  • 골짜기 : 마을에서노고산성을 바라보면서, 왼쪽으로부터 돼지박골, 성밑길, 섶밭, 금성골, 채털이봉, 사태골, 매봉재 등의 골짜기로 명명되어 있다.
  • 동박골 : 안구이목 안쪽에 있는 골짜기.
  • 돼지박골 : 잣미 서쪽에 있는 골짜기
  • 두리봉 : 산성 서북쪽에 있는 산. 산정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들녘이 매우넓다고 함.
  • 매봉재 : 산성 동쪽에 있는 산으로 형상이 매의 모양을 하고 있음.
  • 물봉 : 노고산성이 있는 샘으로 고장에 비가 안 오면 현감이 직접 제관이 되어 이곳 물봉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해방 후에도 수 년간은 기우제를 지낸 바 있다.
  • 박골 : 큰다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성에는 바위가 많다고 하여 바위골이라고도 한다.
  • 사태골 : 잣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새태가 많이 났음.
  • 샘골 : 잣미 서북쪽 노고산성에 오르는 골짜기
  • 성너머산 : 성재산 북쪽에 있는 산. 산의 위치가 마을에서보아 성너머에 있음.
  • 성안 : 노고산성, 허물어진 옛 성이 있음.
  • 장승배기 : 잣미 북쪽에 있는 땅으로 장승이 지키고 있는 수호신으로 두 장군이 서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남쪽이나 북쪽에도 장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더욱 백제성과 신라성의 교전지 였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 합방태 : 잣미 서북쪽에 있는 산 부안 임씨네 묘가 많음.

5. 문화유적

  • 노고산성(老姑山城)
    보은군 보은읍 산성리 잣미마을 북쪽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으로 내북면 서지리 앞을 가르고 있는 보청천을 경계로 해발 396m의 석축. 노고산성과 4㎞ 지점에 떨어진 삼년산성은, 구전에 의하면 이곳은 백제의 산성으로 삼년산성에 주둔한 신라군과 교전하여 패망하였다고 하여 내외성이 거의 파괴되었다. 성곽 정상에는 물봉이 있는데 독특한 구조로 물이 샘솟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한 도자기 수백 점은 공주 박물과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산성 정상에서는 1919년 기미독립만세 때, 이 고장 이용기 의사가 청장년들을 모아 음력 4월 8일 밤 자시를 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게 된 것이 우리 고장 만세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오늘날 이의사를 기르는 비가 내북면 애향 동지회 이름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3백여년전부터 부안 임씨 집성촌이었으나 오늘날 10여 성씨가 살고 있는 부촌 마을이 되었다. 옛지리서에는 함림산성(含林山城), 백봉산성(栢峯山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 백봉사(栢峰柌)
    산성 1리에 있는 사당. 을사사화(乙巳士禍)시 화(禍)를 당해 이천계(李天啓)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864년(고종5년)에 건립하였고 비지정 문화재로서 유림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음.
  • 의사이용기선생의열비(義士李龍基先生義烈碑)
    우리 고장 기미만세 때, 노고산성 정상에서 음4월8일 밤 자시에 독립만세를 외친 이용기선생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1987년 4월 보은유도회와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세운 희혈비가 산성2리 입구에 있다.
  • 이천계 묘비(李天啓 墓碑)
    산성1리 마을 입구에 조선 명종 때, 장령(掌令)을 지내고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신평 이씨괴당 이천계의 묘비를 옮겨 묘각을 만들어 후손들이 보전하는 비지정 문화재로 값진 유산이며 비문은 이조판서 송환기(宋渙箕)씨가 지었다.
  • 황노관선생공적비(黃魯寬先生功績碑)
    산성 송정 입구 동편으로 감싸고 있는 잠두혈 선상에 송림에는 상주 황씨 19세손 송포 황노관 선생의 공적비가 우뚝 세워져 있다. 누에 씨알 개량을 위하여 50평생을 바친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966년 9월 충청북도 잠업관계자 일동의 이름으로 세운공적비이다. 선생은 보은향교 전교로부터 고장의 발전을 위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고 값진 삶으로 1965년 음력 2월 30일 (70세)에 별세하였다.
  • 황윤동추모비(黃潤東膇慕碑)
    경기중학 2회 졸업 후, 일제 때 군수로 임관 되어 장단, 거창, 합천, 거창군수를 지냈으며, 초대 대통령 사무장일 지냈다는 죄목으로 납치되어 오늘날 생사를 모르고 있어 고령으로 사망하였을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유품을 모아 묘를 만들고 추모비를 세움.
    합천군수 당시 선정을 베풀었기에 오늘날 합천시에서는 함벽루상에 공적비를 세워 지방문화재로 보전하고 있다.
  • 황종우선생송덕비(黃宗愚先生頌德碑)
    조선국 의정부 혜민원(보건복지부) 사무관 봉직하였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1700년경 뜻을 바꿔 경기도 용인 서천리에서 보은으로 천거하였으므로 상주 황씨 보은의 중시조가 되었다. 송정 마을 자락을 감싸고 있는 잠두혈에 묘가 있고, 밑에 종중 소유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