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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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 지 정 번 호 : 사적및명승 제4호
  • 지정년월일 : 1966년 6월 24일
  • 위 치 : 내속리면 사내리 산1-1

진흥왕(振興王)의 백부(伯父)가 되는 법흥왕(法興王)때부터 국교(國交)로 정했던 신라는 진흥왕(振興王)때에 이르러 극진한 왕실의 비호아래 불교 발전의 터전이 마련된 것입니다. 진흥왕이 18세 되던 해 월성(月城) 동쪽에다 궁전을 지으려 하였으나 그터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나 왕은 기이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 터에 절을 짓게 하여 황룡사(黃龍寺)라 이름하였고 시작한지 14년만인 32세 되던 해 황룡사의 낙성(落成)을 보자 왕자 동륜(銅輪)을 태자(太子)로 삼아 장차왕위(將次王位)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여생을 불교에 받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즉위 33년에 왕은 연호(年號)를 홍제(鴻濟)로 고쳤는데 이 연호는 일심봉불(一心奉佛)하던 왕이 중생(衆生)을 크게 제도하려는 불교적인 사상(思想)에서 지은 것이라 합니다.

그해 10월20일에 왕은 전사한 군사를 위해 7일간 각처(各處) 명산대찰(名山大刹)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고구려(高句麗)로부터 귀화(歸化)해온 혜량법사(惠亮法師)의 권고에 따른 것으로 왕이 남달리 불교를 받드는 마음이 지극했던 것과 오랜세월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혼이 된 무수한 생령들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이와 같이 불교(佛敎)를 신봉(信奉)하여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법호(法號)를 법운(法雲)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는데 서기 576년 43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친 것입니다.

진흥왕(振興王)의 독실한 봉불정신(奉佛精神)에 따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도량으로 터전이 마련된 속리산 법주사 찬란한 신라의 불교발상지였음을 지금 남아있는 유품들로 인하여 아련히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고승(高僧)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인도에 건너가 불교교리(佛敎敎理)를 터득한 후 많은 불경(佛經) 책을 흰나귀에 싣고와 서기 553년 진흥왕 14년 이곳에 처음으로 절을 이룩함으로써 법주사 창건(創建)의 기원(紀元)이 되었다 함은 일반에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마는 우람한 일주문(一住門) 서호대가람(西湖大伽藍)이란 현판(懸板)이 붙은 문루(門樓)에서부터 대웅보전, 팔상전, 원통보전, 능인전등 불상을 모신 법당과 요사채 특히 무쇠로 된 장철과 김치독으로 쓰였다는 석옹은 그옛날 수천승도(數千僧徒)들이 주거하였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를 사랑으로 감싸고 생명 가진 중생(衆生)을 자비(慈悲)로써 제도하며 효친과 충의를 인간의 으뜸가는 덕목(德目)으로 가르치고 훈련시킨 화랑의 도장임을 생각할 때 우리고장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야 말로 신라(新羅) 천년사직(千年社稷)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자랑스러운 발상지임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법주사(法住寺)가 창건되면서 속리산에는 신비로운 경관과 오묘한 길지(吉地)를 골라 암자가 창건되었으며 경내에는 국보급 문화재(文化財)를 다수 볼 수 있습니다. 법주사 창건후 1,400여년의 유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위로는 국왕을 비롯하여 정치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 학자(學者), 시인(詩人), 묵객(墨客) 그리고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억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고장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갔습니다. 충신도, 역적도 고매한 인격(人格)을 갖춘 도학자(道學者)나 파렴치한 무뢰한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多樣)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쳐간 법주사….그리고 속리산 계곡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흥망성쇠의 역사와 전설과 재미있는 설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크고 작은 소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닥친 고난과 재난의 소멸(消滅)을 발원(發源)한 많은 사람들이 무량(無量)한 불력에 의지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아름다운 일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신라 25대 진흥왕(眞興王) 14년 의신조사(義信祖師)에 의해 창건된 법주사는 167년 후인 제 333대 성덕왕 19년에 중건하였는데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 64호 석연지, 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 그리고 유형문화재(유형문화재) 39호 희견보살상(喜見普薩像)과 석조, 석옹, 석등 등이 모두 이때 조성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그리고 제36대 혜공왕 12년 진표율사가 중건하였고 그후 고려 때에는 태조 1년 왕의 아들인 증통국사(證通國史)가 고쳐지었고 고려 11대왕 문종(文宗)때에는 유식학을 강론(講論)하여 당대의 명성(名聲)을 떨쳤던 고승(高僧) 자정국존(慈淨國尊)이 법주사를 중건하였는데 그의 공적(功績)은 미륵불상 뒤 수정봉(水晶蜂)을 오르는 길 옆 자연석을 파고 세운 그의 비문(碑文)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김부식이 쓴 고대역사에는 법주사를 길상사(吉祥寺)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법주사란 기록은 자정국존의 비문에 나타나 있어 법주사란 명칭이 기록된 것으로는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후 고려 31대 공민왕 11년 홍건적을 피하여 경북 안동으로 몽진하였던 공민왕이 홍건적 퇴각 이후 귀경(歸京)길에 법주사에 들러 부처님 은혜에 감격한 나머지 기념으로 경상남도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 특사를 보내서 불골사리를 뫼셔다 지금의 능인전 뒤 사리탑을 조성하여 안치(安置)하게 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후 조선조에 들어와 제7대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복천암에서 신병 치료를 한후 당대의 고승인 신미선사, 학렬, 학조 등을 인견하시고 법주사와 각 암자를 중수토록 했다고 하며 16대 왕이신 인조(仁祖) 4년 보은에서 태어나 호국불교(護國佛敎)의 터전을 법주사에 정착시키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대공을 세월 불교계에 최고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던 벽암각성(碧岩覺性)이 임란때에 불탄 법주사를 비롯한 암자를 모두 복원하는 대역사(大役事)를 감행하였습니다.이어 고종 28년 서기 1881년 탄응선사가 장장 15년간에 걸쳐 퇴락한 법주사의 모든 건물과 암자등에 새로이 중건하였고 그후 일제시대 그리고 광복이후 혼란기에 걸쳐 사찰유지 관리의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경제발전이 이룩되면서 정부지원과 신도의 시주(施主)에 의해 오늘과 같은 우람한 각종 건물이 복원된 것입니다. 이렇듯 법주사 창건이후 1450여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는 동안 국민의 생활이 윤택하고 국력이 융성할 때에는 법주사의 불교문화가 찬란(燦爛)히 빛나고 국력이 쇠잔하여 국난(國難)을 맞이할 때면 사찰이 퇴락하고 유지 관리마저 어려웠던 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