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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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보은 (삼년산군)

1. 신라의 보은진출과 삼년산군의 설치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대국가의 성립‧발전은 만주에서 한반도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산재한 정치체들 간에 불균등한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이 발전정도를 달리하면서, 또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가지며 전개되었다. 선진적인 남만주 지역에서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구려가 등장하였다. 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진국(辰國)과 삼한(三韓)이 계기적으로 성립하였으며, 이는 후에 백제(百濟), 신라(新羅)로 통합되었다.

삼국이 각각 성장 발전하여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충북지역은 삼국간의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고 보은(報恩), 옥천(沃川)의 남부지역은 주로 백제와 신라가 각축을 벌린 곳인데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충북지역으로의 진출은 크게 두 방면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계립령(鷄立嶺)이나 죽령(竹嶺)을 넘어 남한강의 요충지인 충주(忠州)에 이르는 신라의 북진루트로서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충돌을 빚어왔다. 또 하나는 선산(善山)을 거쳐 부곡(富谷)과 원산(元山)을 지나 보은(報恩)에 이르는 통로로서 백제와 잦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신라가 충북지역에 제일 먼저 진출한 것은 보은방면으로 지금의 보은인 와산성(蛙山城)을 확보하기 위해 1세기 중반과 2세기 후반경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와산성 전투 이후 3세기 초에는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 축조되는 470년까지 보은, 옥천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신라의 세력권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삼년산성의 축조와 신라의 백제공멸(攻滅)

삼년산성을 쌓은 것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의 일이었고,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에는 이찬(伊湌)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고 지금의 선산(善山)인 일선군(一善郡) 부근의 정부(丁夫) 3,000명을 동원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屈山城) 옥천 청산(沃川 靑山)을 개축하였다는 것이다. 소지마립간이 483년과 488년의 두차례에 걸쳐 일선군에 직접 순행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엄청난 국력을 기울였던 축성사업을 독려하기 위한 조치로 더욱 실감나게 해준다.

이곳은 백제의 서남쪽 통로를 통한 신라침입을 사전에 저지하고 나아가 금강유역의 서부지역을 확보하여 백제의 왕도인 공주(公州)와 부여(夫餘)를 인후부에서 겨냥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은 470년 축조된 이래 10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신라의 역사에서 커다란 자취를 나타냈던 곳이다.

관산성(菅山城) 전투(554)때에 삼년산성은 역사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성왕(聖王)(523~554)은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증흥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는 한강유역의 땅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신라의 진흥왕(眞興王)과 동맹하여 때마침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북진을 시작하였다(551). 백제는 옛 땅이었던 한강하류의 6군(郡)을 수복함으로써 그 목적을 이루었으나 도리어 신라의 기습을 받아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553).

이에 분격한 성왕은 554년 7월 가야군과 왜국 등의 세력과 힘을 합쳐 신라정벌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이 때 신라의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지금의 옥천지역인 관산성(管山城)에서 백제군을 막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삼년산군의 고간(高干)이었던 도도(都刀)가 복병을 매복하여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 백제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백제정벌에 나서는데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5만의 정병을 거느렸는데 남천정(南川停)(지금의 利川)을 출발해 삼년산성―산계리토성(山桂里土城)(보은)―장군재(옥천)―구진베루(옥천)―군서(郡西)(옥천)―마전(馬田) 금산(錦山)―탄현(炭峴)의 코스를 거쳐 7월 9일에는 황산(黃山)벌로 진격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백제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렸던 것이다. 삼년산성은 백제정벌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인 660년 9월 28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은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거쳐 위용을 갖춘 이곳 삼년산성에 머무르면서 당나라 사신인 왕문도(王文度)로 부터 당황제의 조서(詔書)를 전달받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갑자기 왕문도가 쓰러져 죽자 그 시종들이 전달의식을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이 건설되면서부터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위치를 청주방면으로 내주었으며, 이 곳이 군사적인 첨병기지로서의 역할은 고려시대 초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즉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날 정도로 후삼국시대에도 고려와 후백제간의 중요한 요충지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