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북면(內北面)
봉황리(鳳凰里)
1. 위치
면적 1.627㎢. 인구 67가구 171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5㎞ 지점으로 면에 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산외면(山外面). 서는 도원리면 (桃源里), 남은 성암리(聖岩里), 북은 청원군(淸原郡) 미원면 (米院面)에 접하고 있음.
2. 연혁
본래 청산현(靑山縣) 주성면(酒城面) 지역으로 부렁바위가 잇으므로 봉황(鳳凰) 이라 하였는데 1906년 보은군에 편입 주성면(酒城面) 지역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사평리(沙坪里), 도엽리(桃葉里) 일부를 병합하여 봉황리로 하여 내북면(內北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도리 -비(桃李葉)[마을] 봉황 북쪽에 있었던 마을. 마을 뒷산과 뚝에 복숭아 나무가 많아 ‘도엽’이라 부르다 변한 것임.
- 모래 - 부리(沙坪)[마을] 도리비 동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는 현재의 전답이 전부 모래땅이 어서 ‘모래뻘’ 이라 하던 것이 변한 것임
- 벌 - 뜸[마을] 마을광장 서남쪽에 있는 마을
- 새 - 뜸[마을] 마을광장 북쪽에 있는 마을
- 주막 - 뜸[마을] 마을광장 동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삼남에서 서울로 가는 삼남대로변에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 라 불려왔으나 마을이 형성된 후 새로 부르는 이름
4. 기타지명
- 가는 - 골[골] 도리비 남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 가마소 -들[들] 도리비 남서쪽에 있는 들. 아주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함.
- 구 - 들[들] 도리비 동남쪽에 있는 들로 성티리 입구로 연결되고 있음.
- 굴 - 바우[바위] 주막듬 동북쪽 굴바우산(28m) 에 있는 바위. 청벽밑에 천연굴이 있는데 바닷가의 굴을 닮았음.
- 굴바우 - 산 [산] 굴바우가 있는 산
- 낭사 - 대[대] 모래부리 서쪽에 있으며 이승칠(李承七) 의사가 자결하였음.
- 말목 - 들[들] 봉황 북쪽 청원군과의 경계에 있는 들. 전에 흐르지 않던 하천이 어느날 흐르게 되자 보를 막아 물을 끌어 농사를 짓기 위해 각자의 경계 표시로 말목을 박았다 함.
- 모래벌 - 청벽[벼랑] 모래부리 서쪽에 있는 천연 절벽. 높이가 100m 정도이며 청벽(절벽) 밑에 달천이 흐르고 모래밭이 광대함.
- 비둘기 - 굴[굴] 굴바위에 있는 굴. 비둘기가 전에 떼를 지어 살았으나 지금은 똥만 남아 있다 함.
- 살구재 - 고개[고개] 모래부리에서 청원군 미원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옛날 삼남대로(三南大路)가 통하는 길목임. 고개 정상에 고목의 살구나무가 있다 함.
- 살목 - 개[냇물] 봉황입구에 흐르는 달천(達川)의 다른 이름.
- 삼발 - 골[골] 가는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시대 삼을 재배하였던 곳이라 함.
- 새 - 들 [들] 모래부리의 남쪽에 있는 들. 전에 이곳에서 처음 보를 막아 경작하면서 먼저 막은 보를 이용하는 들을 ‘구들’ 이라 부르고 이곳은 새들이라 부른다 함.
- 새 - 평[냇물] 굴바우 아래 흐르는 달천의 다른 이름
- 속구 - 바우[바위] 청벽산 봉우리에 솟아있는 바위
- 아칠 - 고개[고개] 모래부리에서 창리장터로 넘어가는 고개
- 원모랭이 - 들[들] 모래부리 동남쪽 산외면 경계에 있는 들
- 작은도리비 - 골[골] 도리비 남쪽에 있는 골짜기. 현 봉황리 서북쪽이 됨
- 장수 - 발자국[바위] 절터거리에 있는 바위로 커다란 발자국이 있음
- 절터 - 거리[골] 봉황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함.
- 청벽 - 산[산] 모래부리 서쪽에 있는 산.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되어있음.
- 치마 - 바우 [바위] 속구바우 서남쪽에 있는 바위. 청벽산 옆으로 느리워진 모습이 치마를 펼쳐놓은 것처럼 보임.
- 큰도리비 - 골[골] 도리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이승칠항왜의결비’가 있음.
- 함박 - 골[골] 모래부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호구 - 앞[바위] 모래부리 동쪽. 굴바우 아래에 있는 바위
- 호룡 - 수(虎龍水)[늪] 모래부리 동쪽 호구암 아래에 있는 달천의 늪(沼). 옛날에 용이 살았다고 함.
5. 문화유적
- 마을회관터
옛날 야간보통학교(2년제) 가 있었으며, 후일 내북초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 이의사승칠공항왜의결기념비 (李義士承七公抗倭義決記念碑)
일본 명치천황(明治天皇)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복입기를 거부하고 청벽산 낭사대에 올라가 장열히 순절한 이승칠을 기념하기 위하여 큰도리비골 입구에 건립한 비로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매년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6. 집성
경주이씨(慶州李氏)
7. 산업
고추. 인삼
8. 전설
- 절터와 장수발자국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그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전성기때는 많은 승려와 신도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때 주지승이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생각뿐이더니 시간이 갈수록 미치게 먹고 싶었다. 아무리 참을래야 참을 수 없던 주지승은 절은 빠져나와 인가가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달밤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도록 어느 한 집에 들어가서 닭장에서 닭을 한 마리 훔쳐 가지고 절에 돌아와 잡아 먹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법당에 들어와 혼자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중얼 거렸다.
“중이 고기맛을 보면 빈대를 남기지 않는다는데 참으로 고기는 맛이 좋구나.”
주지는 다시 부처앞에 꿇어 앉아 참선을 다시 시작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 주지는 등이 가려워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랐다. 법당안이 언제 들어왔는지 빈대가 우글 거리고 있었다. 주지는 장삼에도 온통 빈대가 천지였다.
빈대는 법당뿐만 아니라 절안 모든 건물로 심지어는 마당에까지 우굴거려 도저히 사람이 견딜 수가 없었다.
주지승은 물론 다른 승려들도 모두 절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신도들도 빈대 때문에 절을 찾을 수 가 없었다.
주지승 한 사람의 파계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 다른 사람이 모르게 비밀스럽게 저지른 일이지만 하늘과 땅 그리고 부처님은 알고 죄에 대하여 벌을 준다는 본보기인 것이다.
그런데, 주지가 빈대에게 곤욕을 치를 때였다. 갑자기 법당문이 스르르 열리고 키가 장대같이 큰 무시무시한 신장이 나타나서 법당에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를 업고 사라진 것이다.
지금 이 절 아래 장수 발자국은 그 신장의 발자국이 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번창하던 절은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9. 기타
마을회관 앞 광장에 1991년 9월 10일에 건립한 ‘살기좋은 우리마을 자랑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