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북면(內北面)
대안리(大安里)
1. 위치
면적 1.62㎢, 인구 31가구 89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서남쪽 3㎞ 지점으로 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성티리(星峙里), 서는 법주리(法住里), 염둔리(鹽屯里), 남은 아곡리(峨谷里), 북은 화전리(花田里), 창리(倉里)와 접하고 있음.
2. 연혁
본래 청산현(靑山縣) 주성면(朱城面) 지역으로 높은 지역 안쪽에 있다하여 대안이라 불렀는데 1906년 보은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엽동(葉洞) 일부와 합쳐 대안리라 하고 내북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내-대안(內大安)[마을] →안대안.
- 대안(大安)[마을] 마을 뒷산에 산제당이 있고 앞에 있는 활인봉(活人峰:424m) 밑에 살면 마을이 편안하다 하여 대안이라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대안리(大安里)라 기록하였다.
- 바깥-대안(外大安)[마을] 대안 바깥쪽에 있는 마을.
- 안-대안(內大安)[마을] 대안 안쪽에 있는 마을로 대안리의 중심마을임.
- 외-대안(外大安)[마을] →바깥대안
4. 기타지명
- 곰티-고개[고개] 안대안에서 창리로 넘어가는 고개.
- 냉경[들] 안대안 동북쪽에 있는 냉갱이골 앞들. 날씨가 너무 냉하여 노고지리가 오지못한다 함.
- 대안-고개[고개] →서낭고개.
- 대안-방죽[못] 안대안 앞 도로변에 있는 연목. ‘대안소류지’라고도 부르고 있음.
- 말-고개[고개] 안대안에서 법주로 넘어가는 고개.
- 말구리고개[고개] 안대안 내북주유소 뒤에서 염둔으로 넘어가는 고개. 말고개 동북 능선에 있으며 두 고개 모두 고개가 험해서 말이 넘다가 굴러 죽었다고 한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 ‘말구리고개-살티고개-미티고개-청주에 이르는 길목’이었다고 함.
- 마당대(場峙)[고개] 바깥대안 남쪽에 있는 산위에 있는 터. 옛날 대안리를 개동한 경주김씨의 선조 한 사람이 이 곳에서 무예를 기르고 공기놀이하면서 놀았다고 함.
- 방아-골[골] 바깥대안 남쪽에 있는 골짜기. 방아처럼 생겼다고 함.
- 벼재-고개(星峙)[고개] 바깥대안에서 성티로 가는 고개. 벼랑이 있으므로 ‘별재고개’라 부르던 것이 ‘벼재고개’로 변함. ‘별’은 ‘벼랑’의 고어임.
- 분무-골[골] 안대안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산-너머[산] 안대안 서쪽에 있는 산. 높이 473m.
- 삼발-골[골] 안대안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산삼을 캐었다고 함.
- 상-가마골[골] 안대안 동쪽에 있는 골짜기. ‘선다마골’이라고도 부름.
- 서낭-고개[고개] 안대안에서 바깥대안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 보은↔청주간 19호 국도상에 있음. 전에는 서낭당이 있었으나 도로 확장공사로 없어졌음. 이 고개에서 북쪽 안대안 물은 한강으로, 남쪽 바깥대안 물은 금강으로 흘러가는 분수령이 됨.
- 석-광(石鑛)[광] 안대안 서쪽 산너머에 있는 천연스레트 광산으로 폐광되었음.
- 성티-고개[고개] →벼재고개.
- 솟대-봉[산] 바깥대안 서쪽 큰골 안쪽에 있는 산. 옛날에 솟대를 세웠다고 함. 높이 370m.
- 수리-티[고개] 바깥대안에서 아곡리 조리터로 넘어가는 고개.
- 승조-골[골] 안대안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안터-골[골] 바깥대안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청기와 주유소가 있음.
- 잿-글[글] 안대안 동북쪽 ‘선다미골’에 있는 들.
- 차돌배기[바위] 바깥대안 서쪽 큰골 입구에 있는 높이 1.5m, 지름 1.5m 정도의 둥근 차돌바 위로 도로확장공사로 없어졌음.
- 큰-골[골] 바깥대안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크고 넓다고 하며 처음으로 마을이 이루워졌던 곳이라고 함.
- 팽나무-골[골] 바깥대안 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 팽나무가 있었다 함.
- 활인-봉(活人峰:372m) 바깥대안 북쪽에 있는 산. 예부터 정월 초순에 날을 가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유허만 남아있음.
- 흘팅이-골[골] 안대안 북쪽에 있는 골짜기 외지게 들어앉아 있음.
5. 집성
경주김씨 계림군과 후손이 조선 중기에 처음으로 큰골에서 촌락을 이루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이 번창한 뒤 농지가 있는 곳으로 자연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각성(各姓)이 혼재하고 있음.
6. 산업
고추, 담배.
7. 전설
- 마당대(場峙)와 차돌배기
조선 중기 대안리 경주김씨 집안에 칠곡군수(柒谷郡守) 경성(景聖)의 아들 중 추(楸)가 있었다. 추는 날 때부터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어 집안에서는 이를 감추고 키웠는데 그는 자라면서 힘이 세고 지혜가 남달랐다고 한다.
일찍이 마을 앞 산위에 넓찍한 터에서 무예를 닦고 주위에 있는 큰 차돌을 가지고 놀았는데 마치 공기돌 다루듯 하니 모두 놀랬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가지고 놀던 차돌(크기 1.5m, 둘레 1.5m)을 산아래 마을을 향하여 던졌는데 그 돌은 5리나 날라가 마을 입구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와같은 소문이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는 통덕랑(通德郞)의 벼슬을 주었는데 뒤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는 것이 탄로되어 불길하다하여 잡아다 처형을 하였으나 뒤에 그 억울함을 호소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추증하였다고 한다. 그가 무예를 닦은 곳이 마당대(場峙)이고 마을 앞에 떨어진 차돌을 사람들이 ‘차돌베기’라 불렀는데 그 돌은 1990년도 초까지 도로변에 있었는데 그 뒤 도로확장시 없어지고 그의 무덤은 지금까지 큰골 입구에 남아있고 묘앞에 이와같은 사실을 기록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