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면(馬老面)
소여리(所餘里)
1. 위치
면적 10㎢, 인구 100가구 329명(1999년말) 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 서는 기대리(箕大里), 남은 변둔(卞屯), 한중리(閑中里), 북은 임곡리(壬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는 보은군 탄부면의 지역으로서 소여, 또는 소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소리와 중소리, 하소리를 병합하여 소여리라 해서 마로면에 편입시켰다.
3. 자연마을
- 가새뜸(중소여) : 소여 북동쪽에 있는 마을.
- 꽃밭날 마을 : 꽃밭날 북쪽에 있는 마을.
- 사기정골 마을 : 옛날에는 사기점이 있었다고 함.
- 안뜸(하소여, 새터) : 위터 서북쪽에 마을 소여학교 북쪽 50m 지점 배너머 아래에 있는 마을.
- 작은쇄 : 큰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 경주 김씨 조상들의 묘가 한곳에 자리잡고 있음.
- 중소여 : 가새뜸 마을.
- 큰말(양지말, 양지촌) : 위터 서북쪽 양지에 있는 마을.
- 하소여 : 안뜸 마을.
4. 기타지명
- 개미밑날 산 : 큰말 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허리가 개미허리 같다 하여 생긴 이름.
- 국시바위 : 시루산 상봉에 있는 바위. 김옥균이 집안의 묘를 써놓은 바위로 권세를 상징한다 하여 붙은 이름.
- 굴봉재 : 느름티에서 상주시 화남면 중늘리 재지골로 가는 고개로 굴곡이 많음.
- 기별산 : 큰말 서쪽에 있는 산으로 지형이 게 같이 생겼음.
- 꽃밭날산 : 봄이며 진달래가 많이 핀다고 하여 붙임.
- 느름티들 : 사기점골 북쪽에 있는 들로 느림이 많았음.
- 도룡골 :큰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는 골짜기.
- 된비알산 : 소여 2리에 있는 산으로 비탈이 많아 가파르다고 함.
- 동구나무골 : 예전에 큰 동구나무가 있어 붙은 골짜기임.
- 뒷골 : 안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정성골 펀던에 있음.
- 말랑들 : 가새뜸 남쪽에 있는 들이 상단에 위치하여 붙여짐.
- 맷돌바우 : 소여 2리에 있는 바위로 맷돌처럼 생겼음.
- 배너머고개 : 조상골에서 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임실재 동쪽이 됨. 돌배나무골 너머에 있는 고개 옛날 홍수 때 배가 이 고개를 넘어 왔다고 함.
- 버꾸골 : 소여 2리에 있는 골짜기로 뻐꾸기가 많이 운다고 함.
- 범바우 : 바위 모양이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함.
- 부엉산 : 소여 2리 산으로 부엉이가 많이 운다고 함.
- 북바우 : 큰말 동쪽에 있는 바위로 북같이 생겼으며, 바람이 부는 날에는 북소리가 난다고 함.
- 서당재 : 큰말에서 임곡리 서당으로 넘어가는 고개.
- 섯밭날 산 : 큰말 동쪽에 있는 산으로 지형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붙여진 이름.
- 시루산 : 위터 남쪽 산 모형이 시루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함.
- 양산골 : 큰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산 같이 생겼음.
- 왕래재(旺來峴): 말에서 송현리 웃솔고개로 넘어가는 고개. 홍건적의 침입시 공민왕이 경북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함.
- 용소솜골 : 소여 2리 골짜기에 용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고 함.
- 임실재 : 조상골에서 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잣자골 : 큰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 계곡이 많이 붙여진 이름.
- 잠성골 펀던 : 안골 동쪽 400m 쯤 뒷골에 있는 버덩. 평평하 바위가 넓게 자리잡고 있음.
- 절골 : 소여 동남쪽에 있는 저수지. 주변의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함.
- 줄바우 : 작은 소여에 있는 바위로 죽 이어져 있음.
- 차돌배기재 : 위터에서 상주시 화남면 중눌리먹뱅이로 넘어가는 고개에 차돌이 많음.
- 참샘 : 큰말 앞에 있는 찬 샘을 말함.
- 횟골 : 예전에 백회를 구었다고 함.
5. 전설
- 공민왕의 전설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두 번째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은 그해 11월 18일 서울인 개경을 버리고 경상도 복주(福州)오늘의 안동으로 피난을하게되었다.정세운, 이방실 등의 분전으로 홍건적을 괴멸시키고 개경을 도로 찾았으나, 김용이란 자가 정세운의 전공을 시기하여 정세운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왕은 안동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길에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에서 약 3개월간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마로면 소여리 큰말에서 송현리웃솔고개로 넘어가는 산고개를 왕래현(旺來峴)이라 부르는데 공민왕이 상주에서이 고개를 넘어 관기에 오셨다는 것이다. 왕은 이 곳에서곡식 창고도 짓고 성도 쌓게 하였으며, 감옥도 만들도록 하였다.
오늘날 ‘원앙골’이 사창이 있었던 곳이며, ‘옥갈머리’는 바로 옥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마로면 소재지인 관기(官基)라 하는 것은 관기(館基)라하던 것이변한 것이라 한다. 공민왕은 관기를 떠나 청주로 가던 중 삼승면 원남에서 비를 만나 여기에서 하루를 머물고 갔다. 그때 왕을 따르던 염제신, 이암 등 일곱 워로대신들이 모여 앉아 웃고 이야기하며 시를 짓고 놀 때, 대장군 김하적은 피리를 불고 김사혁 장군은 피바를 타고 대신 황석기가 부르는 시에 화답시를 지으면서 흥겨워 했다는 것이다. 황석기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하면
“푸른 옥잔은 깊고 술맛은 아름답구나. 거문고 소리는 느린데, 피리소리 길다. 그중에 가느다란 노래소리 들리니 일곱 늙은이 서로 즐기는데 수염은 서리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