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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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속리면(外俗里面)

장내리(帳內里)

1. 위치

면적 3.74㎢, 138가구 381명(1999년말).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書院里), 봉비리(鳳飛里), 북서는 구인리(求仁里), 남쪽은 황곡리(荒谷里)에 위치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때, 마장(馬場) 안쪽이 되므로 장안 또는 장내(場內)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평리 사각면(思角面)의 구인리를 병합하여 장내리(帳內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새터마을 : 장터 북쪽에 새로 된 마을.
  • 장터마을 : 새터 남쪽에 있는 마을로 60년대까지도 장이 섰음.

4. 기타지명

  • 거무샘(墨石井) : 서봉 서쪽에 있는 샘. 아무리 가뭄 해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빛이 검푸르다 하여 검음샘이라 하던 것이 거무샘이 됨.
  • 사격장 : 작은 항가골과 큰 항가골 사이에 군 부대 사격장을 1984년 설치하였음.
  • 소재비골 : 장내 2리에 있는 골짜기로 일제시대 주민들이 굶주려서 소를 끌어다 잡아 먹었다하여 ‘소잡이골’이라 하던 것이 소재비골이 됨.
  • 승지골(聖地) : 서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선녀들이 신선바위 옥녀봉에 내려와서 덕행을 쌓았다 하여 성스런 곳이란 뜻으로 성지(聖地)라고 함.
  • 신선바우 : 장안 북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이곳에서 신선들이 놀았다고 함.
  • 옥녀봉(玉女峰) : 장안 서북쪽에 있는 산. 옥여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 함.
  • 작은 항기골 : 승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함씨(咸氏)들이 살았다고 하여 함가골이라 하던 것이 항기골이 됨.
  • 큰항가골 : 작은 항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토골 : 서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최씨들이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토골 또는 최동(崔洞)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은 예비군 종합교육장이 되고 있음.

5. 문화유적

  • 동학대도소터(東學大都所址)와 취회지(聚會址)
    1893년 1월 옥녀봉 아래에 설치하였던 동학 본부였던 대도소(大都所)가 있었던 터다. 건물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1894년 10월 14일자에 기록된 도순무영(都巡撫營)의 우선봉(右先鋒) 이두황(李斗璜)의 기록에 의하면 “동리가 즐비하고 새로 지은 큰 집이 주산 아래 있는데 최법헌이 거처하던 곳이라(洞樣?比而新造一座大屋于主山之下比崔法軒之處所云)” 표현된 것으로 보아 매우 크게 지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도소가 있었던 장내리 29번지 동쪽이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2일까지 수만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길이와 너비가 각각 1백여 걸음이나 되고 높이가 어른의 허리쯤 되는 돌담을 쌓고 모두 그 안에서 농성하며 주문(呪文)을 외우고 “척왜・양창의(斥倭 洋倡義)”, “보국안민”과 “서정쇄신”을 주장한 동학교도 취회지(東學敎徒 聚會址)로 모인 당시 모인 교도의 숫자에 대하여는 “동학란기록”에는 2만여명 “일본외교문서”에는 2만 3천명, “광서조중일교섭사료”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앞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7만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상이하다. 현재는 모두 농경지로 변하였고 대도소 자리에서는 기와파편이 발견되고 취회지에는 당시 돌담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돌의 유구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