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속리면(外俗里面)
구인리(求仁里)
1. 위치
면적 1.6㎢, 90가구 275명(1999년말).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書院里), 서북쪽은 장재리(壯才里), 남은 황곡리(荒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사각면(思角面)의 지역으로 서낭나무와 다리가 있으므로 귀신다리라 하였는데 보은 원님의 처가가 이곳에 있어서 원님이 항상 찾아오므로 귀인다리(歸仁橋) 또는 求仁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목, 방아다리, 쇄실을 병합하여 구인리라 해서 탄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구인(귀신다리, 귀인다리) : 옛날 귀신교(鬼神橋) 또는 지렁이 들()이라고부르던 곳이다.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이성만(李成晩), 은만(殷晩)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당시 보은 현감으로 있던 이번(李蕃)이 영의정으로 있던 그의 아우 이여(李畬)와 함께 이 마을에 들려 두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하고 마을이름이 귀신다리가 아름담지 못하다고 하여 영의정 이여(李畬)가 “효제(孝悌)는 어진 것이 근본이다”라고 말하며, 마을 이름을 구인교(求仁橋)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행정구역 개편시 구인리라고 하였다.
- 대목이 : 방아다리 서쪽에 있는 마을. 예부터 큰 나무가 많았다고 함.
- 방아다리 : 구인 서북쪽에 있는 마을 뒷산등성이가 마치 방아다리처럼 생겼다 하며, 작은 도랑을 건너가는데 디딜방아를 걸처 놓고 다녔기 때문에 방아다리라고도 함.
- 쇄실(松谷) : 귀인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 예안(禮安) 이씨(李氏) 재실이 있는 곳으로 재실이 변한 말로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 하여 송곡(松谷)이라고도 한다.
4. 기타지명
- 마비(馬碑) : 마배라고도 하며, 암소바우 동쪽에있는 들. 하마비가 있음.
- 쇄실고개 : 쇄실에서 귀인다리로 넘어가는 고개.
- 오리샘 : 오리샘 자리에 있는 샘. 이곳에서 전에 오리를 길렀다고 한다.
- 작은골 : 큰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조파미 : 귀인다리 남쪽에 있는 들로서 조,기낭 등 밭 곡식이 잘 되는 곳으로 조 이삭이 파도치는 물결 같다하여 붙인 이름.
- 주봉(珠峰) : 쇄실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구슬같이 생겼다고 함.
- 큰골 : 쇄실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5. 문화유적
- 영창재(永昌齋)
구인리에 있는 예안 이씨 중종 소유의 재실. 1693년(숙종 19)에 예안 이씨 종증의 재실로 건립하였다가 1917년 소실되었던 것을 1922년 다시 중건하였다.
- 이항묘비(李沆墓碑)
조선 연산군 때 은사(隱士) 예안인(禮安人) 이항의 묘비다. 비문은 이조정랑(吏曹正郞) 구수복(具壽福)이 짓고 그의 사촌동생인 성균생원(成均生員) 지(漬)가 썼다.
- 이협묘비(李莢墓碑)
조선 숙종때 예안인 이협의 묘비로 비문은 조병즙(趙秉楫)이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조선조 고종때 세움.
- 항일 투사
1919년 기미 독립만세 때, 보은 고장에서는 10 의사가 있었다. 구인리에서는 이창선, 이준영, 이인하 길상리의 김용석 의사들이 길상리 뒷산 삼봉산정(三峯山)에서 음력 4월 13일밤 자정을 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친 사건이 ‘기미독립만세운동’이었다.
6. 기타
- 구인팔경(구인팔경)
(1) 오봉귀운(五峯歸雲) : 오봉산에 모여드는 구름
(2) 구병명월(九屛明月) : 구병산 위에 떠 있는 밝은 달.
(3) 행단청풍(杏亶淸風) : 행단에서 부는 맑은 바람.
(4) 유수모연(柳藪暮煙) : 버드나무 숲속에 드리운 저녁연기
(5) 옥령단풍(玉領丹楓) : 옥녀봉의 단풍
(6) 선암백설(仙岩白雪) : 선암바위의 흰 눈
(7) 조평춘수(鳥坪春樹) : 조평들에 서 있는 봄철의 나무
(8) 부천야우(鳧泉夜雨) : 오리샘에 나리는 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