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북면(懷北面)
부수리(富壽里)
1. 위치
면적 2.07㎢, 인구 81가구 221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 지점으로 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애곡리(艾谷里), 서는 중앙리(中央里), 남은 눌곡리(訥谷里), 북은 용촌리(龍村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교동(校洞), 종산리(종산里), 지산리(池山里)와 평창리(坪昌里), 사동(社洞), 눌곡리(訥谷里)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부수봉(富壽봉) 아래가 되므로 부수리라 하여 회북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바깥-모산(池山)[마을] 안모산 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바깥쪽이 됨.
- 바락-고개(發花峙)[마을] 바락고개 밑에 있는 마을.
- 아래-숲거리[마을] 아미산 남쪽에 있는 마을. 부수 1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큰 숲이 있었다 함. ‘아래수꼬리’가 변한 것임.
- 안-모산(鍾山)[마을] 부루 2리의 중심마을. 예산ㄹ에 큰 못이 있었는데 그 안쪽이 됨.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 종산(鍾山)이라고도 불렀음.
- 우무-실[마을] 바락고개 북쪽에 있는 마을. 소없이 농사를 지어도 과일이 많아 먹을 것이 풍족했었다 함.
- 웃-골[마을] 향교꼴 동쪽에 있는 마을.
- 향교-꼴(校洞,생지골)[마을] 부수 1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회인향교가 있음.
4. 기타지명
- 구들-티(九平峙)[고개] 바깥모산에서 건천리 공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 옛 회인현에서 보은현으로 가는 큰 길목이었음.
- 구름이-골[골] 바깥모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앞산 너머에 있음.
- 구름이- 재(雲山:200m)[산] 바깥모산 남쪽에 있는 산.
- 국하-배미[논] 우무실 서남쪽에 있는 논. 가운데 못이 있는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이 떨어지지 않고 국이 끓듯이 물이 흐른다 함.
- 꽃-재[산] 바락고개 북쪽에 있는 산. 높이 187m.
- 꽃-재[고개] 안모산에서 애곡리 보고실로 넘어가는 고개. 참곷(진달래) 밭을 이루웠다고 함.
- 독박-골[골] 향교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에 독(항아리) 형태를 한 바위가 있다 함.
- 모산-들[들] 모산 서쪽에 있는 들.
- 바락-고개[고개] 우무실에서 안모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 방구-자리[밭] 바깥 모산 남쪽에 있는 밭. 큰 바위가 있음.
- 뱀-날[산] 향교골 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뱀처럼 생겼다 함.
- 벼락-바우[바위] 꽃재 북쪽에 있는 바위. 벼락을 맞은 후 갈라진 바위큼에 물이 고여있는데, 그 물이 특효가 있는 신선한 약수라 함.
- 보고실-재[고개] 향교골에서 애곡리 보고실로 넘어가는 고개.
- 부용-봉(芙蓉峯:206m)[산] 향교 북쪽에 있는 산. 향교 뒷산으로 봉우리가 다섯 개로 마치 부용이 물위에 나와있는 것 같다 함.
- 부수-봉(富壽봉:360m)[산] 부수리와 애곡리의 경계가 되는 산. 옛 지리서에는 보리산(甫里山)이라고 기록되여 있으며, 이산에 아침노을은 회인팔경의 하나인 부수단하(富壽丹霞)임.
- 선반-다리[길] 구들티 고개에 있는 길. 20여m가 산의 중간에 걸쳐있어 마치 선반을 달아놓은 것 같다 함.
- 수박-골[골] 안모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의 형태가 마치 수박을 쪼개어 놓은 것 같다 함.
- 아미-산(峨眉山,蛾眉山:186m)[산] 아래 숲거리 북쪽에 있는 산. 아미산성이 있음. 옛 회인현의 안산(安山)으로 정상에 성황당이 있어 현감이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고 하며 산의 모양이 눈썹같이 생겼다고 함. 이 산위에 떠 있는 반달은 회인팔경의 하나인 아미반월(峨眉半月)임.
- 아미산-움펑다리[길] 향교골 남쪽 아미산 줄기에 있는 길. 아미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산줄기가 ‘’형으로 움펑하게 패어 있는데 10m, 깊이 4m이다. 산성의 해자(垓子)이다.
- 앞-고개[고개] 아래 숲거리에서 애곡리 쑥티로 넘어가는 고개.
- 앞-산[산] 바깥모산 남쪽에 있는 산. 바깥 모산 앞에 있는 높이 146m의 산.
- 여수-방구[바위] 부수봉 중턱에 있는 바위. 여우 모양이라 함
- 왕-재[고개] 바깥모산에서 애곡리 쑥티로 넘어가는 고개. 이 고개를 제일 많이 넘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전설이 있음.
- 장노래[골] 안모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향교 남쪽 300m 지점에 하마비가 있어 말에서 내려가야 하므로 읍으로 가려면 보고실이나 쑥티로 항상 돌아서 다녔다 함.
- 칼-바우[바위] 바깥모산에서 쑥티로 넘어가는 산에 있는 바위. 칼처럼 새역T다 함.
- 탑사리-들[들] 향교골 서쪽에 있는 들. 옛날 절터였다고도 하고 예종때 영의정이였던 홍윤성의 집터였다고도 함.
- 향교-들[들] 향교골 앞에 있는 들.
- 하마-비(下馬碑)[비] 향교골 앞에 있는 비석. 향교 앞이라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함.
- 홍총-골[골]구루미재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계절의 변화가 화려하고 가을철의 단풍이 아름답다 함.
5. 문화유적
- 회인향교(懷仁鄕校)
향교꼴(校洞) 부용봉(芙蓉峯) 기슭에 남향으로 자맂바고 있다. 건물배치는 후묘전당(後廟前堂)으로 문묘인 대성전은 정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으로 건물내에는 공자(孔子)를 주향하고 4성(四聖)과 송조 4현(宋朝四賢)과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유림에서 봄,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5칸, 옆면 2칸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마루에 난간이 설치되여 있다. 32층의 누문형식으로 1층은 중앙에 문을 달아 외삼문을 겸하고 있고, 2층은 전체가 마루이고 양측면에 방을 마련하였다. 돌담장을 둘러서 ‘일’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중간에 내삼문이 있다. 본래 조선 세종때 건립하였는데, 임진왜란시 불타자 보은향교에 합류하였다가 1611년(광해군3)에 재건하고 그 뒤 여러번 중수가 있었다.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96호 지정되었으며, 남쪽 200m 앞 모산마을 진입로변에 방형의 가까운 판석으로 만들어진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크기는 높이 92㎝, 너비 81.5㎝, 두께 11.5㎝이다.
- 매곡산성(昧谷山城)
아미산에 있는 둘레 695m의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아미산성’이라부르고 있다. 옛기록에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152척, 높이는 8척(昧谷山城 石築 周一千一百五十二尺 高八尺)이라 하였다.
회인천가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평면이 반월형(半月形)으로 서쪽벽 193m는 70~80도의 급경사를 이용하였고, 기타는 대체로 서쪽은 높고 동쪽에 낮은 지세로 되어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매곡성에서 봄, 가을로 관행제를 올린다.(昧谷城春秋令所在官行際)라 하였는데 이 산 정상에 성황당이 잇어 매년 현감이 봄, 가을로 성황제를 거행하였다.
6. 집성
- 단양우씨(丹陽禹氏)
대제학(大提學) 우홍강(禹洪康)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文靖公派) 후예로 부수 2리에 15호가 거주하고 있다.
7. 산업
쌀, 고추, 과수, 두류.
8. 전설
- 아미산성
옛날 아미산 맞은편 송정봉 기슭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낮이면 말달리기 활 쏘기로, 밤이면 글읽기, 글씨쓰기로 나날을 보내던 두 오뉘가 살고 있었다.
이 오뉘는 둘이 다같은 力士로서 서로의 힘 자랑을 곧잘 하곤 하였다. 그 어느 날엔가는 듣기에도 끔직한 목베기 내기 힘겨름을 하기로 두 오뉘는 결정하였다. 오라비는 백 근이 넘는 쇠신을 신고 그 곳에서 서울까지의 삼뱁육십리 길을 당일로 다녀오기로 하고, 누이는 그 동안에 아미산에 석성을 쌓아 놓겠다는 것이, 두 오뉘의 목을 건 힘겨름이었다. 이 일을 안 홀어머니는 힘을 다하여 말렸으나 들어주지를 않으니 두 자식을 다 키우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딸자식을 죽이자는 결심에서 문 한쪽만 달면 끝날 딸을 꾀어 검정콩밥을 먹으라는 핑계로 일손을 멈추게 하였다. 누이가 세 술째 떠넣는 그 밥이 반도 넘어가기 전에 오라비의 쇠신 쓰는 소리가 들려오자 누이는 태연하게 목을 내놓았다. 누이의 목에 칼을 대자 눈물을 머금고 오라비에게 약속은 목숨보다 중하다고 격려의 말을 하며 끝내 누이는 죽고 말았다. 누이의 죽음이 어머니의 술책에서이었음을 나중에야 안 오라비도 「옳지 못한 삶은 옳은 죽음만 못하다」하고 칼을 빼어 공중으로 던지며, 「너는 너 갈대로 가라. 다만 일찍이 우리 오뉘가 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표적을 전하여 다오」하고는 주먹으로 가슴을 쳐서 죽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아무리 죽으려도 죽질 못하고 그저 소낙비같은 눈물만 쏟으며 미친개처럼 돌아다니더니 끝내는 가벼운 몸이 공중을 빙빙 떠다니다가 여름철엔 아미산 근처로 줄줄 눈물을 흘리며 다녔다. 그리고 아드이 던진 칼은 제 홀로 날아 아미산에 박혀 움펑다리를 만들고 칼날은 녹아서 그 앞의 냇물이 되었다고 한다.
- 탑사리들
보은군 회북이면 부수리 향교골에 탑사리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이 홍정승의 집터였다고 한다. 홍정승이란 조선 예종 때 영의정 홍윤성을 말한다.
홍윤성! 그는 조선 5백년을 통하여 가장 파격적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파격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도덕, 법률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는 것이고, 그가 그와 같이 살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보장해 준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그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는 한강을 건너야 한다. 그가 한강에 이르렀을 때 수양대군이 제천정에 나와 놀고 있었다. 대군이 나와 놀고 있으므로 그의 종들이 수십 명식 배에 올라타 손님을 내쫓고 뱃길을 돌리게 하며 베통행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홍윤성이 타고 있던 배에도 이 대군의 종들이 올라와 법석을 떨었다. 이에 홍윤성은 삿대를 꺾어 그 종들을 닥치는 대로 쳐서 한강 물속에 풍덩풍덩 던져버리곤 혼자서 유유히 배를 저어 강을 건넜다. 수양대군이 정자에서 이 꼴을 보고 그 시골 선비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을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영리한 수양대군은 이 일에서 자신의 쿠데타에 이 비범한 그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를 행동대로 썼던 것이다. 김종서를 죽이던 날 저녁에 먼저 당시 훈련원 주부(지금의 군인 훈련소의 계획장교)로 있던 홍윤성은 공사를 보고 한다는 구실로 김종서의 집에 먼저 가서 동정을 살폈다. 김종서는 당시 힘이 세다고 소문난 그를 불러들여 자기의 활 가운데 튼튼한 활을 골라 당겨보라 하였다. 홍윤성은 그 강긍을 당겨 거듭 두 개를 모두 꺾어 버리니 김종서가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첩에게 큰 그릇에 술을 부어주게 하니 세 사발을 마시고 돌아갔다. 세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술 먹기 시합을 시킬 때 으뜸한 것도 그였다. 세조 임금은 그에게 고래같이 마신다 하여 경음당(鯨飮堂)이란 호를 지어주고 그 별호를 새긴 인장을 주었는데 홍윤성은 이 호를 평생토록 즐겨 썼다고 한다. 그는 치부하는 데도 파격적이었다. 다른 고관들이 숨어서 몰래 치부한 데 비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그의 집앞에는 뇌물을 가져오는 심부름꾼과 말, 수레, 가마꾼을 위해 문밖에다 솥을 건 집을 수십 채나 지어 두었다. 그의 호화주택에 세조는 경해(傾海-바닷물이 기울어 든다는 뜻)라는 익살스러운 집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경해 속의 경음당”이라고 무척 자랑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격적으로 살다 간 그의 삶은 어느 면에서 매력이 있다.
그는 1425년에 당시 회인현이었던 회북이면 부수리에서 태어났다. 집이 간나하고 조실부모하여 숙부에게서 자랐다. 1450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1453년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이 되었고 1455년에 세조가 임금이 되자 좌익공신 3등에 인산군에 봉해졌다. 1467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세조임금이 죽자 신숙주, 한명회 등과 원상(다음 임금이 즉위 할 때까지 국사를 처리하는 정승)이 되었다. 1469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1470년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성종 임금 즉위에 세운 공으로 좌리공신 1등이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우성이었고 자는 수옹이었다. 위평이라 시호되었다.
부수리 탑사리들은 홍정승이 태어나서 자란 옛집이 있었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9. 기타
199년 마을 자랑비를 건립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