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북면(懷北面)
오동리(梧桐里)
1. 위치
면적 5.82㎢m 인구 98가구 249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4㎞ 지점인 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신문리(新門里), 서와 북은 청원군(淸原郡), 남은 고석리(高石里)와 용촌리(龍村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오동나무가 있었으므로 먹울 또는 오동(梧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동리(梧桐里)라 해서 회북이면(懷北面)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먹-울(梧桐)[마을] 마을의 형태가 큰 새가 오동나무에 집을 짓는 모양과 닮았다고 함. ‘머귀울’이 변하여 ‘머굴’이 되었음. ‘머귀’는 ‘오동(梧桐)’의 고어임. 예부터 회인현(회인현) 고을 내에서 사람이 살기가 제일 좋다고 일러왔다.
- 양지-말(양지마을)[마을] 오동리 동북쪽 양지에 있는 마을
- 음지-말(桂亭, 음지마을)[마을] 양지말 남쪽 음지에 있는 마을. 큰 느티나무가 있어 ‘계정(桂亭)마을’이라고도 한다.
4. 기타지명
- 갈-고개(살무니고개)[고개] 오동리에서 신문리로 넘어가는 고개
- 갈고개-골[골] 양지말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갈고개 길목임.
- 갈고개-들[들] 양지말 북쪽에 있는 들. 갈고개골 아래에 있음.
- 감반대-골[골] 양지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오동 소류지에서 피반령까지 이어짐. 옛 피반령의 길목이었음.
- 갓-바우[바위] 양지말 북서쪽에 있는 바위. 갓처럼 생겼음.
- 갓바우-구렁[골] 양지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고양골 안에 있으며 갓바우가 있음.
- 강-절[터] 양지말 남쪽에 있는 절터
- 갯골-고개[고개] 음지말에서 용촌리 갯골로 넘어가는 고개
- 고양-골[골] 양지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형태가 암고양이 같다고 함. 갓바우가 있음.
- 고양골-들[들] 양지말 서북쪽에 있는 들. 고양골 아래가 됨.
- 굴-바우[버덩] 양지말 맞은편에 있는 버덩. 밭으로 변하였음.
- 꽃-산(花山)[산] 음지말 남쪽에 있는 산. 봄이면 진달래꽃이 온 산을 뒤덮는다고 함. ‘꽃달뱅이’라고도 부른다.
- 다락-골[골] 음지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 대간-봉(臺干峯:500m)[산] 고양골 안에 있는 산.
- 대간봉-구렁[골] 고양골 안에서 서쪽으로 있는 골짜기.
- 매봉-재[산] 양지말 뒤에 있는 산. 산형이 매와 같다 함.
- 사근-다리[다리] 오동리와 고석리의 갈림길에 있는 다리. 현개 교명은 고석교(高石橋)로 되어 있음.
- 사령이-고개[고개] 오동리에서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로 넘어가는 고개
- 산자-골[골] 양지말 뒤에 있는 골짜기.
- 새끼-다락골[골] 피반령 밑에서 양지편으로 있는 골짜기.
- 샴골-재[산] 피반령 밑에서 음지편에 있는 골짜기. 샘과 산신당이 있음.
- 소시랑-날[산] 음지말 동쪽에 있는 산. 산형이 쇠스랑같이 생겼음.
- 수터-골[골] 음지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작은수터골’ ‘큰수터골’로 구분되여 있음.
- 숫처녀-골[골] 음지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소시랑날 밑에 있으며 옛날에 주씨가 천석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여 ‘주처녀골’이라고도 부른다.
- 숯가마-골[골] 피반령 밑에서 양지쪽으로 있는 골짜기.
- 썩은-밤나무골[골] 고양골 안에 있는 골짜기.
- 실리구렁이-골[골] 음지말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피반령 가든뒤에 있음.
- 약사-골[골] 피반령 밑에서 음지편으로 있는 골짜기
- 안모-골[골] 음지말 서쪽의 골짜기. 예전에 안시들이 많이 살았다 함.
- 애기좁은-골[골] 피반령 밑에서 음지편으로 있는 골짜기. ‘아귀좁은골’이 변한 것임.
- 오동-소류지(梧桐小溜池)[못] 양지말 서북쪽에 있는 소류지.
- 음성-골[골] 양지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아래에 오동소류지가 있음.
- 음터-골[골] 양지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음성골 아래에 있음. 골 입구에 성황당이 있음.
- 이름없는-굴멍[골] 피반령 밑에서 음지쪽으로 있는 골짜기.
- 작은-개미덕골[골] 피반령 밑에서 양지편으로 있는 골짜기.
- 작은-도장골[골] 피반령 밑에서 음지쪽으로 있는 골짜기.
- 작은-약사골[골] 큰 약사골 밑에 있는 골짜기.
- 작은-으징이[골] 양지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 장군-바우[바위] 매봉재 날망에 있는 바위. 장군같이 생겼음.
- 재피-골[골] 매봉옆에 있는 골짜기. 소가 드러누운형으로 예부터 회인 8명당중의 하나라고 일러오고 있다고 함.
- 절-터[터] 고양골 안에 있는 절터.
- 집뒤-말랑[등] 음지말 뒤에 있는 등성이.
- 출구-실[골] 양지말 뒤에 있는 골짜기.
- 큰-개미덕골[골] 피반령 밑에서 양지편으로 있는 골짜기.
- 큰-다락골[골] 피반령 밑에서 양지편으로 있는 골짜기.
- 큰-도장골[골] 피반령 밑에서 음지편으로 있는 골짜기.
- 큰-으징이[골] 양지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 으징이 위에 있음.
- 파드나무-골[골] 피반령 밑에서 음지편을 있는 골짜기.
- 피반-령(皮盤嶺)[고개] 오동리에서 청원군 가덕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보은군과 청원군의 경계가 됨.
- 홍가마-골[골] 음지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5. 문화유적
- 둥구나무(느티나무)
음지말에 있는 높이 15m, 둘레 9m,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로 보은군나무로 지정된 나무다. 매년 칠월 칠석에 마을 사람들이 제를 올리는 신목(神木)이다.
- 민속
-수구제:매년 정월 초사흔날 마을안에서 거행하고 있다.
-칠석제:매년 칠월 칠석에 음지말 둥구나무에서 거행하고 있다.
- 회인현감거사비(懷仁縣監去思碑)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1846~1918)의 풍수지(楓水志)에 의하면 피반령에 1659년(효종 10)에서 1662년(현종)까지 현감을 지낸 정백기(鄭伯基)와 1675년(숙종1)부터 1679년(숙종 5)까지 재임한 황진구(黃震耈)의 거사비가 있다고 기록되여 있으나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음.
6. 산업
쌀, 마늘, 참깨, 사과, 고추.
7. 전설
- 사근다리
피반령을 넘어 회인으로 오는 길목에 고개 아래 오동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지나 한 오리쯤 오면 고석리와의 갈림길이 있고, 이 갈림길이 있는 곳에 “사근다리”라는 다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우리 나라에 온 명나라 대장 이여송은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가 조선의 산천을 보니 정기가 빼어났으므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요, 조선에 많은 인재가 나면 대국인 명나라에 큰 화를 미칠 것이므로 산맥을 끊어 지맥을 없애고자 산천의 지혈을 자른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 이여송이가 싸움이 끝나고 귀국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다보니 산천정기가 득출하므로 군사들에게 산허리를 끊도록 명령하였다. 군사들이 칼과 곡괭이 등으로 산 허리를 자르자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고 그 피는 내를 이루어 흐르기 시작하여 지혈이 끊어진 곳에서 10리나 되는 지점까지 흘러갔다 없어졌다. 이리하여 피가 쏟아진 고개라 하여 이름을 “피반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피가 삭아 없어진 지점을 “사근다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피반령(1)
오리 이원익 선생이 경주목사가 되어 부임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청주에 도착하니 경주호장(-지방관서의 우두머리 관리)이 사인교(四人橋-네 사람이 메는 가마)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신임사또인 오리대감은 그때부터 사인교를 타고 임지인 경주를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음력 6월로서 여간 더운 날이 아니어서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가마를 메고 가자니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었고 호장은 호장대로 옷이 비에 젖은 것처럼 땀에 젖어 걷기조차 힘들었다. 청주를 떠난 지 한나절쯤 걸어가니 크고 험한 고개가 나타났다. 평지를 걸어도 죽을 지경인데 가마를 메고 한낮에 고개를 넘을 가마꾼도 가마꾼이었지만, 호장이 사또를 보니 겨우 난쟁이를 면한 작은 키에 가마 위에서 천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우의 산천을 둘러보며 거드럭거리고 있는지라 사또의 지혜를 시험해 볼겸 한번 골려줄 생각이 났다.
호장은 고개 밑에 이르자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사또 앞에 나아가 허리를 굽힌 후,br/>
“사또, 이 고개는 삼남지방에서 제일 높은 고개이온데, 만약 이 고개를 가마를 타시고 넘을 경우에는 가마꾼들이 피곤하여 회인가서 3~4일 유숙하여야 합니다.”하니br/>
“하루속히 당도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할 형편이었는데 도중에 지체할 수야 있느냐? 내 걸어서 고개를 넘을 것이다.”하고 성큼성큼 고개를 걸어 넘다보니 호장이 히죽이죽 웃으며 따라 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호장의 장난을 알아차린 오리대감은 속으로 (이런 못된 놈이 있나?)하고는 걸음을 멈춘 뒤 따라오는 호장을 향하여 “여봐라! 내가 걸어 넘으면 너는 마땅히 기어서 넘어야 하느니라.” 사또의 지엄한 명령에 호장은 양손과 무릎을 발로 삼아 험난한 고개를 기어서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고개마루에 올라와 보니 호장의 손바닥과 무릎에는 온통 피가 나와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회인서 하루를 쉬고 이튿날 보은으로 오는 도중에 다시 험한 고개에 닿았고 호장이 또 이 고개를 걸어서 넘으라고 하면 다시 기어 넘으라 할 것이 무서워 나무를 베어서 수레를 만들도록 한 후 수레 위에 사인교를 태운 후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br/>
이 뒤부터 “피발”이 되어 넘었다 하여 “피발령”, 수레로 넘었으므로 “수레티재”라고 불렀으며, 한문쓰기를 좋아한 사람들에 의하여 피발령은 피반령(皮盤嶺)으로 수리티재는 차령(車嶺)이라 표기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 피반령(2)
광해 10년(1618)에 조의제라는 선비가 상소를 올렸다가 금부에 끌려가 곤역을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 조동준 노인은 고개마루에 올라가 ‘내 아들 장할시고! 내 아들 장할시고!’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목에서 피가 쏟기 시작하므로 이를 본 선비 두명이 노인의 곧고 의리있는 행동에 감동하여 조노인의 시체를 업고 마을로 내려 오는데 무려 아홉 번이나 피를 쏟아 그 때마다 시체를 내려놓고 닦았으므로 이 고개를 피받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8. 기타
오동리는 예로부터 회인현내에서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1.오동, 2.거교(巨橋), 3.중리(中里), 4.황평(黃坪)이라 하였듯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을 얻은 마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