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북면(懷北面)
중앙리(中央里)
1. 위치
면적 1.57㎢, 인구 228가구 596명(1999년말). 면 소재지 마을로 동은 부수리(부수리), 서는 청원군(淸原郡), 남은 용곡리(龍谷里)와 눌곡리(訥谷里), 북은 용촌리(龍村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소재지로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근동(馬斤洞)과 사동(蛇洞), 눌곡리(訥谷里)와 평창리(坪昌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회인읍내의 중앙이 되므로 중앙리(中央里)라 하고 회북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말-들(馬坪)[마을] 평창 남쪽에 있는 마을. 말무덤 아래에 있음. 먹티천 건너에 있음.
- 사자-골(社루洞, 社洞)[마을] 평창 서북쪽에 있는 마을. 사직단 아래에 있으며 망골천 건너에 있는 중앙 2리.
- 옥도래[마을] 말들 동쪽에 있는 마을. 전에 감옥터였다고 함.
- 평창-동(坪昌洞, 저자거리)[마을] 중앙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장이 섰다하여 ‘저자거리’라고도 불음. 중앙 1리.
- 하마-실(下馬室)[마을] 평창동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었다고 함.
4. 기타지명
- 금수-봉(琴繡峯:219m)[산] 하마실 서남쪽에 있는 산. 이 산의 우거진 단풍나무는 회인팔경의 하나.
- 도살-장[터] 마평 동쪽에 있는 터. 도축장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게이트볼 경기장이 있음.
- 말-무덤[산] 하마실 남쪽에 있는 산. 높이는 143m로 금수봉 밑에 있는 작은 봉우리로 최영 장군이 말을 묻었다고 함. 주위는 현재 밭으로 변했음.
- 망-골(望谷)[골] 중앙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에서 발원된느 망골천은 중앙리 중간을 지나며 1, 2리의 경계를 이룬다.
- 망월사(望月寺, 망골절)[절] 망골에 있었던 절. 지금도 법당과 요사가 있으나 승려는 없고 요사에는 민간인이 살고 있음.
- 먹티-고개(墨嶺)[고개] 중앙리에서 문의면 마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회인현과 문의현의 통로로 고개가 높고 검은 구름이 항상 모여 비가 자주 왔었다고 함. 이 고개와 말구령 사이에는 옛날부터 숫돌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함. 지금도 이 고개의 돌은 모두 숫돌로 사용할 수 있다.
- 반월-지(반월지)[못] 송정봉 밑에 있는 반달모양의 연못으로 회인초등학교 구내에 있음.
- 사직-봉(社稙峯:213m)[산] 사자골 서쪽에 있는 산. 봉우리 아래에 옛 회인현의 사직단이 있었음. 하마산의 동쪽 줄기로 회인현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됨. 이 산에 우거진 소나무는 회인팔경의 하나.
- 송정봉(松亭峯:242m)[산] 마평 서쪽에 있는 산. 정상에 기우제를 지냈던 우단(우단)이 있었다고 하며, 그 아래 백학(白鶴)이 살던 집이 있어 항상 수백마리의 학이 무리지어 날아들어 회인 팔경의 하나가 되었으며, 하마산 서쪽줄기로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됨.
- 쇠전-거리[거리] 마평 동쪽에 있는 거리. 옛날 우시장이 섰던 자리로 현재는 복지회관이 있음.
- 수-각(水角)[절벽] 옥도래 남쪽에 있는 절벽. 옥녀봉 밑이 되며 남류하던 회인천이 이 절벽에 부딪히며 물줄기가 직각으로 휘여 동쪽으로 흘렀으나. 1980년 수해복구공사로 회인천이 개수되여 지금은 볼 수 없음.
- 수각-모통이(수각통랭이)[모롱이] 수각절벽 끝에 있는 모롱이. 회인~대전간 도로의 분기점.
- 수각-못(水角沼)[소] 수각 아래에 있었던 웅덩이. 남쪽에 있다하여 옛 선비들은 ‘남담(남담)’이라 불렀으며, 여름철 어린이들의 수영놀이가 성행하였으나, 회인천 개수공사로 없어졌음.
- 신작로-들[들] 사자골 동쪽에 있는 들.
- 아래-수꼬리[거리] 아미산 남쪽에 있었던 숲,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웃수머리’와 연계하여 ‘꼬리’라 불렀으나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자 ‘숲거리’라 고쳐 불렀고, 숲도 없어졌음. 현재 부수 1리에 속한 ‘아래숲거리’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중앙 1리의 평창동에 속한 마을이었음.
- 아미산-소(峨尾山沼)[소] 아미산 절벽 아래로 흐르는 회인천에 있는 웅덩이.
- 아미산-앞[들] 평창동 동쪽에 있는 들. 아미산 아래에 있음.
- 안은산-골[골] 하마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옥녀-봉(玉女峯:157m)[산] 옥도래 남쪽에 있는 산.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 하며 회인팔경의 하나.
- 웃-수머리[거리]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숲. 회인중학교 앞에 있으며, 현재는 두어그루의 느티나무가 남아있음. 이 숲 아래인 아미산 남쪽에 있던 숲을 ‘아래수꼬리’라 불렀으며 이 숲아래의 시원한 것을 ‘북수청풍(北藪淸風)’이라 하여 회인팔경의 하나로 일컬어왔음.
- 작은-먹티골[골] 하마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찬셈-골[골] 말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찬샘물 옻샘이 있음.
- 찬샘물-옻샘[샘] 찬샘골에 있는 약수터. 피부병에 좋다 함.
- 큰-먹티골[골] 하마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하마-산(何磨山:280m)[산] 중앙리 서쪽에 있는 산. 옛 회인현의 진산(鎭山)으로 좌우 줄기에 송정봉과 사직봉이 있음.
5. 문화유적
- 회인인산객사(懷仁仁山客舍)
객사는 고려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1983년 해체보수할 때 대들보 아래의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655년(효종 6)에 중건하고 1803년(순조 3)에 중수하였고, 건물의 이름이 ‘인산객사(仁山客舍)’임이 밝혀진 건물로 종래에는 회인현의 동헌 또는 미산관(眉山館)으로 불려왔다. 일제시대에는 보통학교 교사로 또는 면사무소와 예비 군중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해체보수되었다. 자연석의 얕은 기단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정면 8칸, 옆면 2칸 팔작지붕으로 굴도리 5량구조의 홑처마 익공계로 기둥은 원주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우물마루를 짜고 좌․우 2칸은 익실로 마루와 연결되여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객사특징을 잘 나타내는 건물로 앞에 외문(外門)이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16호로 지정되었다.
- 회인현관아지(懷仁縣官衙址)
옛 물헌에 의하면 회인현 관아는 객사 21칸, 관아 18칸, 향청(鄕廳) 6칸, 현사(懸司) 5칸, 작청(作廳) 6칸, 군기청(軍器廳) 3칸, 형옥(刑獄) 등으로 되어있으며, 지도에 의하면 객사는 매곡산(昧谷山) 서쪽에 남향으로 현사는 하마산 아래 동향으로 창사(창사)는 금수봉 아래에 표시되여 있다. 한말 유학자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의 풍수지(風水志)의 먹티천을 기록한 것에 의하면 “묵계수(墨溪水)는 묵령(墨嶺) 아래에서 동으로 흐르며 아남산(峨南山)과 함택(咸澤)의 북쪽으로 쏟아져내려 송정(松亭)과 금수(錦繡) 사이를 지나 현해(懸廨)의 오른쪽이요 향사당(鄕射堂)의 왼쪽의 좁은 공간과 인가(人家) 사이를 꿰둟고 미산관(眉山館) 앞에서 풍수에 흘러들어간다.(墨溪水注之, 水出墨嶺下東流逕蛾南山 咸澤之北 瀉出于松亭錦繡之間逕縣廨之右鄕射堂之左突人家而東逕眉山館之前以注於楓)라는 기록과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객사는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인산객사이고 옛 동헌(東軒)은 현재 교회가 있는 곳에 있었던 목조기와(옛 회인지서가 사용)를 중심으로 뒤에 남아있는 전면 7칸, 옆면 3칸의 ‘ㄱ'자형 팔작와가와 전면 4칸, 옆면 2칸 팔작와가 그리고 없어진 옛 잠업 및 가마니 수매창고가 있었던 터에 현사등이 있었고 말무덤 아래에 있는 농협창고터에 창사(倉舍)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형옥은 지금의 옥도래에 있었다.
- 사직단지(社稷壇址)
사자골 서쪽에 사직봉 아래에 현재 퇴락한 상태로 남아있음. 현재 주민들에 의하면 그 터에서 사직제(社稷祭)를 거행하고 그 날을 ‘면민의 날’로 정하였음.
- 성황사지(城隍祠址)
문헌에 동쪽 매곡산 위에 있고 현감이 춘․푸로 제사를 지난다고 기록되었으므로 지금의 부수리에 있는 아미산(蛾眉山) 정상임.
- 사직단지(社稷壇址)
사자골 서쪽에 사직봉 아래에 현재 퇴락한 상태로 남아있음. 현재 주민들에 의하면 그 터에서 사직제(社稷祭)를 거행하고 그 날을 ‘면민의 날’로 정하였음.
- 여단지(厲壇址)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주인없는 외로운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주던 곳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현재 회북면사무소 북쪽 산줄기가 멈춘곳인 옛날 거북바위가 있었던 터로 추측할 수 있다.
- 비갈(碑碣)
- 현감이후언수청덕불망비(縣監李候彦秀淸德不忘碑):1766년(영조 42)부터 1770년(영조 46)까지 회인현감을 역임한 이언수의 공적비로 1771년에 세웠으며, 현재 회인초등학교 경내에 있음.
- 현감이후지형영세불망비(縣監李候趾馨永世不忘碑):1785년(정조 9)부터 1787년(정조 11)까지 재임한 이지형 현감비 1786년에 세웠으며, 회인초등학교 경내에 있음.
- 현감이후후식영세불망비(縣監李候厚植永世不忘碑):1802년(순조 2)부터 1807년(순조 7)까지 재임한 이후식 현감비 1823년에 세웠으며, 회인초등학교 경내에 있음.
- 현감이후시좌영세불망비(縣監李候時佐永世不忘碑):1823년(순조 23)부터 1827년(순조 27)까지 재임한 이시좌 현감비 1854년에 세웠으며, 회인초등학교 경내에 있음.
- 박홍소(朴洪韶:1624~1626), 김근행(金謹行:1646~1648), 이순남(李順男:1653~1659), 최신(崔愼:1686~1688), 송필(宋畢:1692~1697), 서종적(徐宗積:1708~1713), 이수빈(李壽彬:1776~1779)등 현감의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하였으나 없어졌음.
- 동면장우석원송덕비(東面長禹錫元頌德碑):1909년 건립된 비로 회인초등학교 경내에 있음.
- 지주문의이장수씨자선불망비(地主文義李長壽氏慈善不忘碑):1939년 건립된 비로 중앙 2리 도로변에 있음.
- 경종홍종성송덕비(警鍾洪鍾聲頌德碑):1976년 회인의용소방대 청사건립 유공으로 세움.
- 배천후인조종구송덕비(白川后人趙鍾求頌德碑):회인중학교 부지 희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87년 중학교 교정에 세움.
- 거북바위
회북면사무소 북쪽 도로변 동쪽 둑길에 직경 315㎝, 높이 75㎝의 둥근 석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은 북향의 거북이 형상의 자연석 바위다. 본래 이 바위는 지금의 위치보다 조금 북쪽의 자연석 암반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으로 없어지게 되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매년 음력 시월 초순에 택일하여 동제를 지내고 있다. 위치로 보아 옛 회인현 여단으로 추측된다. 거북이는 길이 110㎝, 높이 49㎝이다.
- 민속
산제와 수살맥이:중앙 1리는 금수봉 중턱에 있는 산제당. 중앙 2리는 사직봉에 있는 산제당에서 정월 초사흩날 산제와 수살맥이 제사를 거행하고 있다.
6. 산업
쌀, 마늘, 고추, 잡곡, 상업, 써비스업.
7. 전설
- 말무덤
옛날 고려 때 이야기다. 최영장군이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할 때 장군에게는 참으로 잘 달리는 말이 있었다. 장군은 이 말을 매우 사랑하여 항상 타고 다녔다. 장군이 큰 뜻을 품고 그 때 서울이었던 개성으로 떠나기 앞서 이 말의 주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매곡성에서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고 말을 달리게 한 후 이지점에 당도하니 화살이 보이지 않는지라 이와 같은 느린 말로서는 도저히 자신의 큰 뜻을 펴보지 못할 것을 알고 화를 내면서 단칼에 말의 목을 치고나자 하늘에서 화살이 그제서야 떨어지는지라 장군은 크게 후회하소 이곳에다 말을 묻었다고 한다.(어떤 이는 최영 장군이 아니라 조재룡이란 장사였다고 하는 이도 있음)
그리하여 말무덤을 중심으로 무덤 아래 마을을 하마실(현재 회인초등학교 앞마을)이라 부르고 무덤앞에 있는 마을을 말들(현재 회북파출소 앞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년 전에 이 말무덤이란 곳을 개간을 하여 밭을 일구자 말의 뼈가 나왔다고 마을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8. 기타
1997년 2월 20일 우리마을 중앙 2리라는 자랑비를 거북바위 옆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