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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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부면(炭釜面)

하장리(下長里)

1. 위치

면적 2.28㎢, 인구 152가구 430명(1999년말)
면 소재지 마을로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임한리(林閑里)와 구암리(九岩里), 서는 벽지리(碧池里), 남은 대양리(大陽里), 북은 상장리(上長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탄부면(炭釜面)의 지역으로서 긴매(長山)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진미 또는 하장산(下長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장리(下長里)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닭-모랭이(唐隅里)[마을] 진미 동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함. 하장 2리가 됨.
  • 진-미(長山, 下長山, 下唐, 긴장대)[마을] 하장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뒤쪽으로 긴 산이 둘러있고 땅이 황토질이라 질기다고 하여 긴장대라고도 함, “긴메"의 충청도 방언인 ”진메“가 변하여 ”진미“가 되었음.

4. 기타지명

  • 감재-들(감저티)[들] 닭모랭이 남쪽에 있는 들. 벼농사가 잘 되지 않아 감자를 심었더니 풍년이 되어 들 전체에 감자를 심었다고 함.
  • 도장-골[골] 진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졸밭골의 첫 번째 골짜기로 골안이 안방처럼 아늑하다 함.
  • 동오리-산[산] 진미 동남쪽에 있는 산, 높이 153m 원앙들 복판에 있는 둥근산.
  • 뒤-께[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오래전부터 깨의 생산지였다 함.
  • 뒷-골[골] 진미 뒤쪽에 있는 골짜기.
  • 비선-골[골] 가평이씨의 덕을 기리기 위한 비가 서 있는 골짜기.
  • 샘-너머[들] 청계샘 서쪽 너머에 있는 들.
  • 서당-골[골] 진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이 있었음.
  • 숲-밖(쑤밧)[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전에 버드나무 숲이 있었는데, 경지정리시 없어졌음, 숲의 바깥쪽이 됨.
  • 숲-안(쑤안)[들] 진미 동남쪽에 있는 들. 버드나무 숲 안쪽이 됨.
  • 윗-들[들] 진미 남쪽에 있는 들.
  • 웃-골[골] 진미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 원앙-들(元央坪)[들] 진미 남쪽에 있는 들.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잘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함.
  • 이문이-골[골] 진미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잔-허리(자노리)[산] 진미 동북쪽에 있는 산. 지형이 잘록하게 되어 있음.
  • 전문-거리[거리] 진미동쪽 월성명정의 정문이 있는 거리.
  • 줄밭-골[골] 진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골 모양이 긴 밭모양이라고 함.
  • 청계-샘[샘] 진미 서쪽에 있는 샘. 물이 맑고 수원이 좋음.
  • 청양-골[골] 지형이 청룡형이라 함.
  • 친한-바위[바위] 진미 서쪽에 있는 바위. 이 바위에 언제나 모여앉아 친하게 노는 사람이 많다고 함.
  • 하당-저수지(下唐貯水池)[못] 진미 북쪽에 있는 못.
  • 홀깨미-동산[산] 하장 북쪽에 있는 산. 산제당이 있음.

5. 문화유적

  • 익재영당(益齋影堂)
    진미미을에 있는 익재(益齋) 이제현(李劑賢)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이다. 1504년(연산군 10) 후손인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이 폐비 윤씨의복위를 반대하다가 이곳으로 부처(付處)되었을 때 건립하였다. 건물은 삼문까지 3동으로 전면에 “염수재(念修齋)”라는 재실이 있고 그 뒤에 영당이 있는데, 그 사이에 내삼문을 설치하고 담장을 둘렀다.
    영당은 전면 2칸, 옆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익공을 달았으며, 그 안에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영정은 초상화로 정본이 아니라 묘사한 부본인데, 길이 165cm, 너비 96cm로 호상(胡床)에 좌측면관좌상(左側面觀坐像)이다. 정본은 국보 제 110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봉안한 영정은 충청북도지방 유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도난을 당하였으나 이듬해 서울에서 발견되었고, 보관의 어려움이 있어 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본을 봉안하고 있다.
    중문은 소슬삼문이며 재실은 목조 2층으로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집인데 1층 중앙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念修齋”란 현판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글씨라 하며, 내부에는 “익재선생 영정각 증수기”가 걸려있다.
  • 월성명정(月城名旌)
    진미 정문거리에 있는 효자 3인과 열녀 2인의 정문이다. 정면 6칸 옆면 1칸, 맞배지붕의 건물로 효자인 이창경(李昌慶), 원경(元慶), 명경(鳴慶) 삼형제는 강도가 집에 쳐들어 와서 아버지를 해치려 할 때 어린 나이에도 용감하게 강도를 막고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였으며, 연안김씨(延安金氏)와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남편에 대한 열행으로 삼형제는 1666년(현종 7)에 연안김씨는 1747년(영조 23), 창녕성씨는 1794(정조 18)에 명정되어 현판하였고, 맨 우측에는 후손 이덕우(李德雨)가 쓴 “문강공눌헌이선생절충기적비(文剛公訥軒李先生絶忠記蹟碑)”가 세워져 있다.
  • 이명백충신각(李命百忠臣閣)
    닭모랭이 보덕중학교 앞에 있는 충신정문이다. 가평인(加平人) 이명백(李命百)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마로면 적암리에서 왜군의 진로를 막고 수차례 싸우다 순절하였다. 1812년(순조 12)에 명정되어 처음 구암리에 정문을 세웠다가 1970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1칸, 옆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 정암구연홍선생교육송덕비
    보덕중학교 설립인가의 공적을 기린 비로 1983년 중학교 정문 앞에 건립한 비다.
  • 민속
    산제 : 홀깨미동산에 있는 당집에서 매년 정월 초이튿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제를 올리고 있다.

6. 산업


7. 기타

진미 입구 도로가에 1988년 애향비(愛鄕碑)를 세웠고, 그 옆에 다시 1998년 마을자랑비를 건립하였다 애향비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인심좋고 예의바른 우리 마을 눈 앞에는 넓은 들, 기름진 땅, 풍년을 약속하네 누구나 마음씨 곱고, 살기좋은 우리마을 진미마을 너와 나는 진미를 떠날지라도 못잊을 우리마을 진미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