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면(三升面)
서원리(西原里)
1. 위치
면적 2.79㎢, 인구 96가구 223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북서쪽 2.5㎞ 지점으로 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탄금리(彈琴里), 서는 옥천군(沃川郡), 남은 원남리(元南里), 북은 선곡리(仙谷里)와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報恩郡) 삼승면(三升面)지역으로서 서쪽 언저리라 하여 서원(西元)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동(梨洞)과 서니면(西尼面)의 황토리(黃土里) 일부를 병합하여 (西原里)라 하고 삼승면에 편입하였다.
3. 자연마을
- 감나무-골(枾洞)[마을] 서원 북쪽에 있는 마을. 감나무가 많음.
- 배나무-골(梨洞)[마을] 감나무골 북쪽에 있는 마을. 마을 앞에 큰 배나무가 있고 서원 1리의 중심마을임.
- 서원(西原)[마을] 금적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서북쪽은 병풍을 친 듯 하고 삼승면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음. 조선 현종때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아우인 세한재 송시도(歲寒齋 宋時燾)가 일경당이란 서숙을 건립하고 강학하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음.
- 시-동(枾洞)[마을] -> 감나무골
- 신-촌(新村)[마을] 배나무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삼승초등학교가 있음.
- 웃-말[마을] 서원 서쪽 위쪽에 있는 마을.
- 원-서원(元西原)[마을] -> 서원
- 이-동(梨洞)[마을] -> 배나무골
4. 기타지명
- 가재-골[골] 원서원 서쪽에 있는 골짜기. 가재가 많음.
- 개두울-봉[산] 배나무골 서남쪽에 있는 높이 284m의 산.
- 꽃밭-골[골] 원서원 서쪽에 있는 골짜기. 꽃이 많이 핀다고 함.
- 굴-샘[우물] 원서원 서쪽에 있는 샘. 굴속에 있음.
- 금적-산(금적산:652m)[산] 서원리 서쪽에 있는 산. 삼승면과 수한면, 옥천군, 안내면의 경계가 되고 있다.
- 동-메(獨山:190m) 감나무골 동남쪽에 있는 외딴산, 마을 동쪽이 된다.
- 딸-바우[바위] -> 용도바우
- 떡-바우[바위] 원서원 서쪽에 있는 바위. 바위가 떡 벌어졌음.
- 둔박-골[골] 원서원 서남쪽 소류지 위에 있는 골짜기. 절골 아래가 됨.
- 말등-재[산] 배나무골 서쪽에 있는 산. 형상이 말 잔등같이 생겼다 함.
- 매-바우[바위] 매바우 산에 있는 바위. 매같이 생겼다 함.
- 매바우-산[산] 감나무골 서쪽에 있는 산. 매바우가 있다.
- 무시박-골[골] 꽃밭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다른 곳보다 평평하다 함.
- 문-앞[들] 원서원 동쪽에 있는 들.
- 배나무골-고개[고개] 감나무골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고개.
- 병목-안[골] 배나무골 서쪽 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병목처럼 생겼음.
- 병풍-바우[바위] 금적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병풍처럼 생겼음.
- 서당-골[골] 감나무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이 있었음.
- 서원리-소류지(西原里 小留池)[못] 원서원 남쪽에 있는 못.
- 서원이-골[골] 감나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서당골 남쪽임.
- 선지-들[들] 원서원 동남쪽에 있는 들. 원남리까지 연결됨.
- 수실-대[골] 원서원 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어귀 소나무가 있는 곳을 일컬음.
- 아들-바우[바위] -> 용도 바우
- 안터-골[골] 원서원과 원남리 상원암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안터골-고개[고개] 원서원에서 원남리 상원암으로 넘어가는 고개
- 얼거실-들[들] 감나무골 동쪽에 있는 들.
- 여수-골[골] 배나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여우가 많았다 함.
- 용도-바우(아들바우, 딸바우)[바위] 바위에 구멍이 둘 있는데 아이를 못 낳는 사람이 아들, 딸 어느쪽이든지 소원대로 돌을 던져 넣으면 뜻이 이루어진다고 함.
- 자래-바우[바위] 감나무골 서쪽에 있는 바위. 자라처럼 생겼다 함.
- 작살-고개[고개] 원서원에서 탄금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재판-골[골] 배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절-골[골] 배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절골-샘[우물] 절골 중간에 있는 샘.
- 집-넘어[들] 원서원과 감나무골 사이에 있는 들.
- 집넘어-고개[고개] 원서원에서 감나무골로 넘어가는 고개
- 큰-골[골] 배나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큰골-바우[바위] 큰골에 있는 네모난 바위.
- 큰골-소류지[못] 큰골 아래쪽에 있는 못, 상가소류지라고도 부른다.
- 큰참나무-샘[우물] 샘 위쪽에 큰 참나무가 있었음.
- 팽나무-골[골] 원서원 동쪽에 있는 골짜기. 팽나무가 있었고 산제당이 있었음.
- 한밭-들[들] 감나무골 앞에 있는 들. 큰 밭이 있었다 함
5. 문화유산
- 산앙사지(山仰祠址)
1707년(숙종 33)에 창건하여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영정을 봉안하고 뒤에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와 운곡 송강석(雲谷 宋康錫)의 영정을 추가 배향하였던 사우로 1891년(고종 8) 훼철도어 주춧돌만 남아 있었던 곳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 금적산 봉수대지(金積山 烽遂臺址)
조선초기에 금적산 정상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청산 박달라산(靑山 朴達羅山)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에 있는 회인 용산점(懷仁 龍山岾)으로 연락하였던 봉수대터다.
- 민속
산신제 : 팽나무골에 있었던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2~3일(택일)에 거행하였으나 현재는 중단되었음.
6. 산업
과수, 담배
7. 전설
- 금송아지와 금비둘기
보은군 삼승면 서원리에 남북으로 삼태기 모양으로 길게뻗은 산이 금적산(金積山 - 해발 652m)이고 이 산에는 전 국민이 3일간 먹을수 있는 보배가 묻혀 있다고 전해 오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먼 옛날이다.
이 산에는 금송아지와 금비둘기가 살고 있었다. 금송아지는 금비둘기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산기슭에 밭을 일구어 금비둘기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곡식을 갖추어 심었고 양지바른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바위 아래 옹달샘을 파서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금비둘기에게 청혼하여 둘은 결혼하여 내외가 되었다. 금송아지와 금비둘기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금슬좋은쌍의 부부로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 불행하게도 금송아지는 밭을 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두 눈이 멀고 말았다. 그 후 비둘기는 눈먼 남편을 열심히 봉양하였으나 금비둘기의벌이로는 도저히 금송아지를 충족히 먹일 수 없었다. 그럿게 몇 해가 지나자 아내인 금 비둘기는 남편 섬기기가 고통스럽게 느껴 지면서 짜증을 냈고 둘은 자주 다투게 되었다.
어느 날 하루종일 남편을 위해 식량을 물어나르던 금비둘기는 마침대
“나도 이제는 도저히 못참겠어요 난 나대로 갈것이니 당신은 당신대로 살 길을 찾아 보도록 하세요”
하고는 금송아지가 울면서 붙잡았지만 매정스럽게 뿌리치고 어디론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금송아지는 그 후 산기슭을 헤메며 아내를 부르다가 지친 나머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금송아지가 죽은 산을 금적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금송아지가 죽었을 때 머리는 북쪽으로 두고 꼬리는 남쪽으로 향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꼬리쪽인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에는 사금이 많이 나고 머리가 있는 북쪽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에는 부자가 많이 난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