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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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近代)

〈조선후기의 사회사정과 보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연이어 일본과 청의 침략을 받아 일어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조선사회는 크게 동요하였다. 전란 중에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되었고 그 결과 국가 재정이 궁핍할 정도로 경제 상태가 악화되었다. 사회체제가 기존질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적 사회발전 과정과 맞물려서 전근대 사회구성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충청도 남서부에 위치한 보은의 사회상도 그 변화되는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보은이 근대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의 변화상을 정리한다.


1.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변화

조선사회의 기본구조는 상하관계의 질서를 갖는 신분제를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었다. 양반‧중인‧평민‧천민 네 개의 신분층간에는 모든 면에서 차등을 두게 하였고, 특권을 독점한 층은 최상급 신분인 양반이었다.

양반 가문에 태어나면 사서삼경과 시문 등을 공부행서 과거를 볼 수 있었다. 과거 급게자는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또 음직이라고 해서 선대의 음덕에 의해 관직에 나아가는 기회도 주어졌다. 이 양반층은 인구의 1할 이내였다. 피지배층은 평민은 5할, 그리고 천민은 4할 정도여서 적은 수의 양반이 지배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 이후 17세기 말에는 양반이 8.3%로 불과했는데 18세기 말에는 37.7%로 많아졌고, 19세기 중엽에는 무려 65.5%나 되었다. 반면 평민과 천민의 비율은 급속히 줄어들어 각각 32.8%와 1.7%로 감소했다. 이 수치는 특정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신분변화의 방향을 보여주는 까닭에 주목된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정부는 양란이후 사회 경제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써야 공공경비를 공공연히 관직을 팔아서 충당하는 편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실제로 공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벼슬이 아니라 직책만 기록한 공명첩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산 사람은 관아에서 인정하는 양반에 되었으며, 불법으로 족보를 매매하여 양반행세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천민이 관청에 얼마간 재물을 내면 속량(贖良)이라고 해서 평민으로 인정해 주었다.

농촌경제의 변화는 농법 개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에 크게 힘입고 있었다. 벼농사를 할 때 종래 널리 써왔던 직파법은 볍씨를 심어서 수확할 때까지 논에서 직접 재배하는 방법이었다. 이 농법은 일품이 많이 들어 양란(兩亂) 이후 인구가 줄어 노동력이 부족하자 농민들은 모내기 농법으로 점차 확산시켜 생산력을 키워갔다.

조선후기의 변화 물결 중 하나가 시장이 생겨서 장사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유통경제가 발달한 것이다. 상품으로 잘팔리는 작물은 채소를 비롯하여 인삼같은 약초 그리고 기호식품인 담배 등이 있다. 특히 면화는 중요한 상업작물이었다. 보은지역의 대추도 지역특산물로서 널리 팔려 나갔다.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절박한 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문란한 조세수취의 정치 문제에 있었다. 정부는 세금을 안정되게 걷기위해 삼정을 총액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제도는 농민들에게 수취업무를 맡은 지방관과 향리, 그리고 이에 같이 관여한 세력가들이 마음대로 수탈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환곡은 춘궁기에 굶는 농민을 구휼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는데, 임란 이후 나라 살림이 궁핍해지자 가을에 덧붙여 받는 이자를 재정에 보태 쓰게 한 이후 세금으로 변했다. 군정의 문제는 두드러졌다. 군역세는 평민만 내는 신분세였는데 평민 가운데 양반으로 상승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수가 적어졌어도 총액을 다 내야하는 것은 변함없었다. 이에 따라 두세 번 거듭내거나, 어린아이와 죽은이의 몫도 계속 맡아냈고, 극빈자와 도망자의 몫까지 집안과 동네에서 억지로 내야만 했다.


2. 정치체제의 위기

조선의 집권 관료체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매우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안으로는 양반 지배세력이 내부로부터 분열되었고, 나라의 제정은 만성적으로 부족하여 권력의 기반까지 허물러져 갔다. 밖으로는 서양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일본에 강요하여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은 후 근대시설을 갖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상품을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군시 침략까지 강행하고 있었다. 조선도 이같은 침략 위험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유교사상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바탕으로 양반 관료층에 의해 통치되는 체제였다. 조선본래의 정치가 안정되려면 왕권과 양반관료층간의 기울지 않은 공존관계가 전제되는 것이고, 양반관료층 내부에서 각 세력 간 균형이 잡혀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지배층의 내부의 안정된 균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양란 이후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어려운 문제가 산적하자 그 해결 방법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졌고, 양반 관료들은 붕당을 형성해서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 결과 한 당파가 권력을 독점해서 일부 양반이 높은 관직을 독점해간 반면에 대부분의 양반이 정권에서 아예 밀려나게 되었다.

정치면의 위기느 국내 요인과 더불어 국제정치면에서도 야기되었다. 중화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 사실은 조선에도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조선 근해에도 서양의 기선이 여러차례 출몰하여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북경을 거쳐서 들어온 천주교는 성리학에서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상하관계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내용 때문에 지배층에게 커다란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켜서 이단을 배격하는 척사론이 대두되었다.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도 커져갔다. 임진왜란 당시 입었던 혹독한 피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누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과 국교를 맺고 조선과 새로운 근대 형태의 통상무역을 하려는 시도는 의혹감을 불러 일으켰다.


3. 19세기 보은과 회인의 사회사정

19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의 보은 사정을 상세히 전해주는 자료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없어 내용이 미약하다. 19세기 전반 보은과 회인은 기존 지배 질서가 동요하는 가운데 양반이 중심이 된 사회 구조가 유지되었다. 보은 경내의 정치질서는 보은 관아(官衙)가 정점이 되어 특유의 관계가 이루어졌다. 중앙에서 파견되는 지방관인 군수는 음직(蔭職)으로 환로(宦路)에 나아가 정5품 또는 정4품의 품계로 오른 관리가 보임 되었고, 회인현은 음직 6품관이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회인과 보은은 서울에서 청주를 거쳐 청산을 가는 교통로의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다. 청주에서 가는 길의 주요 지점은 청주→두산(5리)→피반령(5리)→회인(15리)→보은(30리)→황간(30리)→추풍령(20리)이다. 이 교통로는 서울에서 천안과 청주를 거쳐 추풍령에 이르는 지름길에서 벗어나 있지만 상주(尙州)로 가는 중요한 통행로였다. 보은에는 큰 역(驛)이 두 군데 설치되었다. 함림(含林)과 원암(元巖)이 그곳이다. 함림역은 읍에서 북쪽으로 7리 떨어져 있는데 큰말 2필, 타는말 2필, 짐싣는 말 5필을 길렀다. 이역을 유지하기 위해 역리(驛吏)가 30명, 역노(驛奴)가 40명이 정해졌다. 원암역은 읍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데 큰말 1필, 타는말 5필, 짐싣는말 5필을 갖춰서 필요에 대비했다. 이역의 역리가 15명, 역노는 15명이고 진천(鎭川)에서 황간(黃澗)에 이르는 17개 역참(驛站)을 관할하는 율봉찰방(栗峰察訪)에 소속되어 있었다.

보은은 10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사각면(思角面)‧속리면(俗離面)‧왕래면(旺來面)‧탄부면(炭釜面)‧마로면(馬老面)‧삼승면(三升面)‧서니면(西尼面)‧수한면(水汗面)‧내북면(內北面)‧외북면(外北面)이다. 각 면에는 상급 지배신분층을 이루고 있는 양반들이 동성동본 마을을 이루고 세거하였다. 큰 성씨는 북실의 경주김씨(慶州金氏), 관터의 능성구씨(綾城具氏), 원암의 은진송씨(恩津宋氏), 고승의 풍천임씨(豊川任氏), 임한의 기계유씨(杞溪兪氏), 서느실의 화순최씨(和順崔氏), 둔덕의 창원황씨(昌原黃氏) 등이다.

회인은 동면(東面)‧서면(西面)‧남면(南面)‧북면(北面)‧강외면(江外面)‧읍내면(邑內面)의 6개면으로 구성되었다. 경작지가 얼마되지 않고 인구도 적은 회인의 양반 성씨는 다른 군현에 비해 큰 위세가 없었다. 애곡의 단양우씨(丹陽禹氏), 금곡의 남원양씨(南原梁氏), 눌곡의 영해박씨(寧海朴氏)가 세거하던 큰 성씨였다.

소작도 하지 못해 토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은 다른 생계 방도로 나무꾼으로 전락하여 나무를 해서 파는 것 밖에 마땅한 것이 없었다. 양반층들은 자연을 훼손한다고 하여 읍 주변 24리 안에서 벌채를 금지하자 자연히 불만이 쌓여갔다.

따라서 1862년 진주민란(晋州民亂) 이후 삼남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날 때 회인에서는 이에 자극을 받아 나무꾼들이 항쟁을 벌이게 된다. 1862년 5월 14일 회인에서 봉기한 나무꾼들은 떼를 지어 읍내를 향하면서 지나가는 마을마다 양반들의 집에 불을 질렀고, 읍내에 들어와서도 양반지주들과 향리들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질러 보복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동헌에 밀려들어가 현감 서호순을 위협하였다. 현감은 그 기세에 눌려 난민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였으나, 읍내서 물러나 온 이들은 바로 해산하지 않았다. 외면에 나가 평소에 혹독한 지주경영으로 인해 인심을 잃었던 양반 지주가를 찾아다니며 불을 지르면서 보복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당시 농민생활을 궁핍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수령과 서리층의 탐학 행위도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있었던 암행어사의 보고에 의하면, 보은 군수 윤정효는 1857년 사징전(査徵錢) 1,120양을 중간에서 착복하였고, 1861년에는 재해를 입어 면세된 땅 중 31結을 농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대로 세금을 받아 착복하였다. 이런 비리의 실상은 온갖 방면에 걸쳐있으며, 힘없는 농민뿐만 아니라 부유층을 집중 수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이 집권한 초기에는 일련의 혁신정치가 이루어졌다. 중앙에서는 세도정치의 중심인 안동김씨를 배척하고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조치를 강구했으며, 지방에서는 세도정치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부패한 관리를 내몰았으며 지방 토호의 무단 행위를 금지하였다. 조세제도를 고쳐 평민에게만 부과되던 군포를 호포라고 해서 양반에게도 바치게 하였다. 그 결과 어느 정도 민심이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10년만에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본래 대원군은 정치 기반이 취약한 위에 서원을 철폐한 이유 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맹렬한 반대를 받았고 무리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서민층에 토대를 둔 지지세력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새로 등장한 민씨정권(閔氏政權)은 국내외 양면에서 전개되던 심각한 국면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충분한 대책도 없이 외국 여러 나라와 근대 무역을 허용하는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76년 일본과 조약을 맺은 후 구미 제국주의 열강과 잇달아 국교를 확대하자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고 값싼 외국 상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보은과 회인은 무역을 하던 인천, 원산 등의 항구와 멀리 떨어진 내륙에 자리잡아 직접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구지역에서 많은 쌀을 사서 가져가는 까닭에 쌀값을 기준으로 하는 물가가 크게 오르는 현상은 다르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가뭄과 홍수 그리고 태풍, 그 위에 돌림병과 병충해가 끊임없이 닥쳐왔다. 19세기 전 기간 동안 3년에 1년 정도가 흉년이었으며, 2~3년 이상 계속되는 흉년에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삼남 각 지역의 수많은 군현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은과 회인의 향촌민들은 모순이 누적된 조선 말기의 사회구조 속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부패한 정치가 지방에서 드러나는 현상인 조세 수탈이 자행되고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빈부차이로 인해 갈등이 심각하게 야기되었다. 국교확대 뒤에느 값싼 상품과 근대 무기로 장비된 군사력을 앞세운 노골적인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청(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침략 사실들은 그때그때 국내에 전해져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민족종교인 동학(東學)이 교세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특히 충청도 지역은 전라도와 경기도 등으로 급속히 확장되는 중심지로 역할하였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이르는 커다란 흐름이 충청도를 하나의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것이다.



동학(東學)의 창도(創道)와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 동학의 창도

동학은 1860년 4월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가 경상도 경주 땅에서 창도한 종교이다. 새로운 민족종교인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국가가 처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그대로 투영되었다. 동학교리에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고, 전통 주문과 부적 등 민간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회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시대 이념이 들어가 있고, 외세에 대한 단호한 배격주장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쉽게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혁신 지식인을 통하여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다.

최제우는 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지 자신이 몰락한 양반가의 일원으로서 19세기 조선의 혼란한 사회 현실을 직접 겪은 인물이었다. 동학의 경전인《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에는 교조 최제우의 현실과 인식과 난국의 극복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즉 모순에 찬 사회현실과 거세지는 외세 침략의 위기를 자각하고, 신비한 종교 체험을 통해 제세(濟世)와 구국(救國)을 위한 우리의 새 민족종교를 창도한 것이었다.

경전에서 파악하는 사회인식은 명확하다. 당시는 왕조의 시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였다. 조선사회 체제의 근본 바탕인 신분제는 여기서 부정될 수밖에 없었고, 그 부정논리는 신분제의 차별대우로 인해 고통받던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어 갔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의 생각을 고치고,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풍습을 만들며, 노비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러한 사회를 많은 농민들이 동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조선국가의 지배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집권세력은 외세에 대한 배격문제에는 시각이 같았지만 신분제를 부정하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동학이 커지면 왕조정부에 정면 대항할 수 있다는 종교단체로 위기의식을 느껴 1864년 봄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교조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교조가 처형된 뒤 동학은 사교로 간주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관헌에 붙잡혀서 처벌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용담에 모이던 교도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2. 동학교세의 확대

동학은 제2세대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활동에 의하여 다시 교세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최시형은 태백산으로 피신하여 화를 모면한 뒤 소백산맥 양편지역의 험준한 산골 마을을 거점으로 여러 군현을 전전하며 은밀히 포교해 나갔다.

이 시기에 동학이 퍼져나간 지역은 강원도‧충청도‧경상도의 울진‧정선‧영월‧보은‧괴산‧단양‧충주‧상주‧김산‧문경‧예천‧안동‧순흥 등지였다. 모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골짜기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서 유사시 험한 산길을 통해 피신하기 적합한 지역이었다.

동학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이래 구미 열강과 국교를 확대한 이후 더욱 교세를 확대시켜 나가게 된다. 영국과 조약을 맺은 뒤 기독교의 포교가 허용되고 외세의 침투가 본격화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동학은 더욱 포교를 확대해 나간 것이다.

1880년대에는 북접 교단의 주요 지도자가 되는 인물들이 입도하였다. 1883년에는 손병희‧손천민‧박인호‧황하일‧서장옥‧안교선‧여규덕‧김은경‧유경순‧김영식‧김상호‧안익명‧윤상호 등은 이후의 교단에서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호남에는 뒤에 남접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입도해왔다. 이들은 남영조‧김낙철‧김낙봉‧남계천‧손화중‧김덕명‧박치경‧김석윤‧호택규‧김개남‧조원집 등이다.

동학이 충청도 일대에 널리 퍼져서 교세가 커지는 중심지가 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교주 최시형의 포교 거점이 소백산맥 줄기와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충청도 여러 군현으로 쉽게 교세가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 그 하나의 배경이 된다. 또한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진취적인 인사들이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들어야 하겠다.


3. 교조의 신원운동

1890년대 들어와 교세는 종전과 달리 삼남 일대에 널리 확장되고 동학교도들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동학을 사교로 간주하는 지방관아의 탄압은 계속되고 심해져서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동학교세가 증대되자 더 이상 사료로서 박해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내부에서 대두하였다. 왕조정부에 요구하여 포교의 공인은 먼저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최재우의 죄명을 씻어주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하였다. 교조의 원한이 풀려지면 자연히 동학을 사교로 간주하는 금지조치가 해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몇 차례 일어나게 된다. 본격적인 신원운동은 1890년대에 들어서서 시작되었다. 국교확대 후 10년에 걸친 사회변동은 농민 생활의 몰락을 가속화시켰고 외세에 대한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라한 사회분위기는 동학이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데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1891년 충청감사 조병식이 부임한 뒤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정도가 심해져 교단의 방침을 바꿔 교조신원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교단의 고위 간부들인 서병학과 서장옥이 1892년 7월 교주 최시형을 은신처로 찾아가서 교단 차원에서 신원운동을 역설하고 교주의 허락을 받지 않은채 공주에 동학교도들을 모이게 하여,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교조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금지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사태가 이같은 방향으로 진전되자 최시형도 동학 각 조직에게 전라도 삼례로 집결하도록 통유문을 보내게 되었다. 이 해 11월 삼례에는 수천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강경한 내용의 호소문을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하였다. 각 군현의 지방관이 동학교도들을 지목하여 체포하고 돈과 재물을 탈취하며 사상자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에 가세하여 양반들이 가혹한 탄압을 하고 있으니 이를 금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창도이래 처음 시도된 대규모 집회로서 지방 관헌에게는 적지 않은 압력이 되었다. 전라감사는의 회답은 “동학은 조정에서 금하는 바라. 인간의 본성을 이미 갖추었으며 어찌 정학을 버리고 이단에 나아가 스스로 죄를 짓는뇨. 반드시 미혹하지 말라”하였다. 그러자 물러나지 않고 계속 압력을 가하면서 호소문을 다시 제출하였다. 전라감사는 그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관하 각 군현에 공문을 보내게 되는데 내용은 동학에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타일러서 정학 즉 유교의 공부에 힘쓰게 해야 하지만, 박해는 금지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교조신원운동은 지방 관헌을 대상으로 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왕조정부에서 금지하기 때문에 감사로서는 그 조치를 따를 수밖에 없고 신원에 관한 권한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활동 방향은 분명해져 서울로 올라가 국왕에게 호소하는 방법뿐이었다. 동학교도들의 복합상소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추진되었다.



〈1893년의 보은집회와 그 전개과정〉

1. 1893년의 보은집회와 왜양(倭洋)의 배척

전라감사의 침학 금지 공문이 관하 각 군현에 내려간 후 삼례 집회에 모였던 동학교도들은 해산하였다. 그렇지만 침학 금지는 말뿐이었고 동학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교단에서는 왕조정부에 교조의 신원을 호소해서 포교를 공인받아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히게 되었다. 이에 1893년 정월 보은군 속리면 장안마을(장내리)에 대도소를 정하여 교단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보은의 장안마을은 이 때부터 각처의 교인들에게 동학교단의 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은 집회를 전후한 시기부터 동학의 움직임은 단순한 교조신원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공주와 삼례집회의 직접 원인이 된 지방관의 수탈 문제에 덧붙여 외세의 침투로 야기된 민족의 위기를 자각, 대응하는 활동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미 한달 전 서울에서 복합상소를 할 때부터 격문 등의 방법을 통해 반외세 행동은 나타난 바 있었다.

보은 집회의 일차 통유문(3월 11일자)은 교조 신원과 사회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차로 나온 통유문(3월 16일자)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에 내세웠다. 이 통유문은 전국의 동학 조직에 일제히 집결하라는 지시를 전하면서 보은집회의 성격을 밝힌 것이다. 조신원운동은 이렇게 하여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앞세우는 사회운동으로 변하여갔다. 즉 종교운동으로 시작했지만 개혁과 외세 배척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한 단계 발전해간 것이다.

교조의 제사를 위해 동학 지도부가 청산 갯마을(浦田)에 모인 때인 3월 10일, 교주 최시형은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많은 동학도인들을 한 지역에 모이도록 하여 정부에 압력을 넣어야겠다는 것이다. 집회장소는 보은의 장안마을로 정했다. 장안은 교주가 오랫동안 주재하여 동학본부로 정해진 곳이었고, 각처의 도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서 잘알려진 장소였다. 그리고 이미 훨씬 전부터 많은 수의 교도들이 이 장소에 모여 있었다. 관헌의 지목과 추적에 쫓긴 동학교도들은 자연히 함께 모여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도생의 방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때 최시형과 더불어 한 자리에 모였던 중요 지도자들은 손병희(孫秉熙)‧김연국(金演局)‧이관영(李觀永)‧권재조(權在朝)‧권병덕(權秉德)‧임정준(任貞準)‧이원팔(李元八) 등이다. 이들은 청주‧보은‧청산‧옥천‧상주 등지의 동학지도자들로서 즉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최시형이 보은의 장안마을에 도착한 날은 청산에서 교조 제례를 마친 다음날인 음력 3월 11일이었다. 일단 집결 지시가 떨어지자 동학교도들은 이미 집결한 사람들과 합세하여 말 그대로 「바람에 흔들리고 구름과 안개가 메워지듯이」아니 밀물이 밀려오듯이 장안에 모여 들었다. 매일 각처에서 각각 수백명 단위로 몰려와서 불과 몇칠만에 수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동학교도들은 전라도의 금구 원평에 모여들었다. 원평집회가 동시에 열린 이유는 첫째 한 지역에서 일시에 많은 사람이 멀리 떨어진 보은까지 가서 참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하나이다. 봄철 농사 준비가 바쁜 이 시기에 여러 날이 걸리는 외지 출타가 경제면이나 시간상 어려웠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는 보은교단의 지도부와 성향이 다른 적극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회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물론 이 당시에는 교단의 지도부가 위치한 장안 집회의 중요성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각처의 핵심간부들은 장안마을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교주와 함께 주요 방침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2. 보은집회의 전개과정

3월 11일 보은 관아의 삼문 밖에 붙인 격문 내용은 종교문제를 떠나 왜양(倭洋)과 맞서려는 자세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단순한 교조신원이 아닌 보국안민과 척양척왜 구호는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크게 해칠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장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이 같은 통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뭉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협상하였던 것이다.

보은집회는 지방관아에서 볼 때 전무후무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즉각 보은군수는 왕조정부에 보고하여 그 실상을 알렸다. 그리고 향리의 우두머리를 시켜서 동학 지도자를 만나보게 하고 또 자신도 직접 달려가서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였다. 그 같은 관변측이 대처한 과정과 탐지한 내용은 〈취어(聚語)〉에 상세히 조사되어 있다.

장안마을에는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이 집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대단히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었다. 이 기와집은 지금은 터만 남아 마을 뒤쪽의 논으로 변했는데 그 당시 독실한 교도가 살았던 집으로 보인다.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돌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 흩어져서 잤다.

“산아래 평지에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일 백여 걸음이고 넓이도 일 백여 걸음이며, 높이는 반장(半丈) 정도로 사방에 출입문을 내었다.” 이 기록은 돌성의 규모를 보여준다. 이 때 쌓은 돌성의 흔적이 지금도 논둑을 이루고 있어 그 형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성을 쌓을 때 필요한 자갈은 바로 옆으로 흐르는 삼가천에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따라서 많은 수의 동학교도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짧은 시간 안에 적지 않은 규모를 갖춘 돌성을 만들 수 있었다.

돌성과 도소 사이의 거리는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도소와 돌성 안을 부지런히 오가는 교도들이 서로 만나면 읍을 하고 양보하였으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모습에 엄숙하고 신중한 모양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들은 공동생활을 하여 어슬렁거리는 것을 금지했다. 돌성 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우며 교인으로서의 수행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 의식은 각지에서 모인 교도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모인 동학교도들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나 일인 당 돈 1푼씩 걷었는데 모두 2백 3십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천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먹을 양식은 각기 직접 몇일분을 가지고 왔고, 또 식량 조달을 책임진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단에서 대량으로 준비했던 것 같다.

3월 20일 최시형은 포(包)의 이름을 정하고 대접주를 임명했다 대규모의 집단 활동을 위해서 포 단위의 조직을 제도화한 시도였다. 당시 정해진 포명과 대접주는 50명에 이르지만 정확한 내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3월 16일에 해산명령을 내리는 한편 다음날인 17일에는 호조참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임명하여 현지로 가서 해산시키도록 했다. 군수 이중익은 3월 22일 장안마을로 가서 해산을 종용했으나 동학도들은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왕조정부는 해산령을 내린 뒤인 3월 25일 동학도의 보은집회를 처리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열렸으며, 어윤중은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직명이 바뀌어 충청감영 영장 이승원(李承袁)과 군관 이주덕(李周德)을 거느리고 보은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군수 이중익도 대동하고 장안마을에 직접 가서 동학도들 중 학식있는 사람들과 만났다. 이들은 허연(許延)‧이중창(李重昌)‧서병학(徐丙鶴)‧이희인(李熙仁)‧송병조(宋秉照)‧조재하(趙在夏)‧이근풍(李根豊) 등이다. 양반신분의 소유자들로서 동학 교단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로서 밝혔다.

저희들은 선왕조의 덕화로 살아온 백성이며 천지지간에 무고한 창생(蒼生)이 옵니다. 수도(修道)하여 五倫과 三綱의 밝음을 알고 마음속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함이 있습니다. 왜놈과 오랑캐는 짐승 같은 줄은 비록 어린이라도 알고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중략) 그런데 왜양(倭洋)을 물리치려는 창의가 어찌 큰 죄가 되어 한편으로 체포하고 한편으로 소탕하려고 합니까?(중략) 감사의 병폐는 이미 심해져서 저 무고한 창생들로 하여금 모두 도탄에 들어가게 하니 목숨 귀하기는 같은데 어찌 이렇게 잔인합니까? 또 왜양(倭洋)이 우리 임금을 위협함이 극에 달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음으로 막는다는 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하략)

어윤중은 명을 받고 보은까지 내려오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동학의 교세와 도인들의 성향을 파악한 다음에 동학도들과의 대화에 나서고 있었다. 따라서 집회의 의도를 자세히 듣고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주장이 명백한 동학도들에게 위압보다는 설득을 통해 해산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 다음날인 3월 27일 어윤중이 고종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은 동학도를 만난 경위와 동학도들의 주장을 아래와 같이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다.

(상략) 그들의 본뜻은 다만 한 마음으로 척양척왜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는 것뿐인데 방백(方伯)과 장리(長吏)들이 비류(匪類)로 대하여 침탈하고 학대함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중략) 오직 바라는 것은 우리들의 실정을 조정에 알려서 적자로 인정한다는 임금님의 밝은 뜻을 얻도록 하는 것이며 그러하면 마땅히 물러가서 생업에 힘쓰겠다고 말했습니다.(하략)

정부는 3월 28일 어윤중의 장계 내용을 논의한 결과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장위영(壯衛營) 영장 홍계훈(洪啓薰)에게 병력 6백명을 이끌고 보은으로 내려가도록 명령했다. 동학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경병(京兵)은 기관포 3문까지 가지고 3월 30일 청주에 도착하였다. 4월 1일에는 청주 영장이 1백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보은 읍내에 도착했다.

동학 교단의 지도부는 정면 충돌하지 않으려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 최시형은 먼저 노약자들을 물러가게 하고 젊은 장정들만 남아서 정부의 조처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침 고종의 윤음을 전달받은 어윤중은 곧 청주진 영장 백남석(白南奭) 및 보은군수와 함께 장안마을로 가서 윤음을 읽어주고 퇴거하기를 명령하였다.

결국 동학교도들은 4월 2일부터 장안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20일 간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지쳐 있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하였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 방면을 향해 떠났다.

이처럼 한국 역사의 중심에 떠올랐던 보은 지역은 동학 제2세교주 최시형이 중시하여 도소(都所)르 둔 곳이었고 교통이 편하여 삼남의 교도들이 오가기 쉬웠던 까닭에 1894녀 또다시 동학의 본부 역할을 하게 된대. 교주 및 고위 간부들이 청산 갯밭과 보은 장안을 오가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락하고 활동을 해나갔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보은상황과 북실전투〉

1.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보은의 상황

1893년 봄 보은군의 장안 마을에서 열린 동학 집회가 해산된 뒤에도 구조적인 사회 모순 속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탐욕스런 수탈행위는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군현에서 농민들이 체제에 저항하는 항쟁이 속속 일어났다.

삼남 일대의 동학 교세는 갈수록 확대되었고 1894년(고종31년)에 지배층에 대한 농민들의 전면 항쟁이 촉발되었다. 그 계기는 전라도 고부군의 농민항쟁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분격한 농민들은 전봉준(全琫準)의 지휘 아래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무기를 빼앗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원성이 많았던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안핵사 이용태(李容泰)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농민항쟁의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씌워서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전봉준은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化中)‧김덕명(金德明)과 함께 각처에 창의문(倡義文)을 돌려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직후부터 전라도일대 수천의 농민들이 합세해 와서 곧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처음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한 뒤 백산을 점거하여 기세를 올렸고, 전라 감영에서 파견한 영군도 황토현에서 격파했다. 정부에서 경군(京軍)의 정예부대를 급파하여 진압하도록 하자 동학농민군은 남하하여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으로 진군했다. 1만여명으로 늘어난 군세로 장성에서 경군과 싸워 패배시키고 곧장 북상하여 전주를 점령하였다.

이같은 소식은 경상도‧충청도 등지로 퍼져나갔다. 지하에서 숨어서 포교하던 동학 조직들은 표면에 나와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거침없이 동학에 입도해 교세가 날로 확대되었다.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전라도 농민군의 첫 봉기와 때를 같이 하여 무장 봉기에 나섰다. 사회개혁의 이념이 서로 통하여 전봉준과 밀접히 지냈던 혁신지식인 서장옥(徐章玉)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충청도 지역은 봉기에 반대하던 교단의 지침에 의해 확산되지 못했다.

무장한 농민군이 읍내로 들어가 점거하고 관아를 장악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방관아에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마을도 반상(班常)의 상하 관계 질서가 무너져갔다. 양반들은 힘을 잃고 토호 행위로 인심을 얻지 못한 사람은 앙갚음 당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향리들 가운데 수탈이 지나쳤던 사람을 해를 입었다.

교주 최시형은 1894년 정월 청산의 문암(文岩)마을에서 전봉준이 동학조직을 동원하여 무장 봉기하고 고부군을 격파했다는 급보를 전해 듣고 무장봉기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너무 급하게 서둘지 말고 뒷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관리들에게 탄압을 받아온 교도들은 동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서 실현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6월 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지게 되자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더욱 거세졌다. 전라도 지역은 물론 충청도 일대에서도 일본과 전쟁을 벌이려는 농민군의 준비작업이 전개되었다. 친일파 관료들이 정권을 쥐고 갑오경장을 추진하는 소식은 농민군의 활동을 격화시켰다.

하지만 교주 최시형은 교세의 확대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칫하면 호된 탄압이 우려되어 전라도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동학 농민군을 거듭 질책하였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도인들에게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전라도 농민군은 이같은 교주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기에 이르러 남접(南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충청도 대부분의 군현에는 교단의 방침을 지키려는 대접주들이 조직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말단 접 조직의 성향은 전라도의 활동을 추종하는 예가 많았다. 또 그렇지 않아도 동학을 금지하는 관리들은 남북접을 구별하지 않고 탄압을 시도했다. 그래서 점차 충청도의 상황은 전라도를 닮아 마침내 여름에서 가을에 걸치는 기간에 충청도의 여러 군현은 읍내만 제외하고 동학 조직이 향촌지배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교단은 지나치게 극렬한 행동은 금지했으나 사회개혁은 대세의 흐름으로 간주하고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학의 포접(抱接) 조직이 장악하고 있는 군현을 순회해서 개혁 작업의 조정을 맡도록 간부들을 파견했다. 감찰관과 안렴사로 불렸던 이들은 가는 곳마다 농민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송사의 처결을 의뢰할 만큼 신임을 얻었다.

전라도 남접농민군은 9월에 들어 총대장 전봉준의 결정에 따라 다시 무장 봉기하였다. 이에 교단 내부에서도 나라의 위기에 직면하여 일본과 싸우자는 의견이 우세하여 교주 최시형은 청산에 불러모은 각포 두령들의 의견을 좇아서 9월 18일 기포를 결정했다. 이 기포령에 호응하여 충청도 각 군현의 동학 조직들은 무장하여 보은에 집결했다. 단양과 충주방면에서 남하하는 동학 농민군들은 속속 커다란 세력을 이루어 합세했다.

보은 장안 마을에는 도소가 있는 주변 일대에 4백개의 초막(草幕)을 만들었다. 옥녀봉 아래의 대추나무 밭 사이에 나무가지로 뼈대르 엮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만든 초막의 대열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수만의 이르는 대군이 장안 일대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어 황간과 영동지역의 여러 마을에 나누어 장기적인 주둔에 대비하였다.

최시형은 북접 농민군의 지휘권을 통령(統領) 손병희(孫秉熙)에게 맡겨서 전라도의 농민군과 합세하도록 했다. 북접군은 오색기로써 각 포를 분간하게 하였다. 영동과 황간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북접 농민군이 논산으로 출진한 것은 10월 23일경이다. 이 날부터 옥천을 거쳐 서쪽으로 행군하는 농민군 병력이 줄을 이었다.

논산에서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과 10월 말에 합류한 손병희 휘하의 북접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 나섰다. 11월초에 벌어진 우금치 공방전은 치열하였다.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둣 높았으나 전투는 병력의 수와 사기만으로 치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의 무기는 열악했고, 일본군은 근대무기로 무장한 정예병이였다. 산 정상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올라오는 농민군을 향해 쏘아댔다. 이렇게 수십차례를 거듭하다가 결국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은과 영동‧황간을 비롯한 충청도 남부 일대의 상황은 농민군의 주력이 빠져나간 뒤에 역전되었다.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이 차례로 순회하면서 동학 도소를 비롯한 근거지를 파괴하고, 남아있는 동학의 지도자들을 붙잡아 처형했으며, 교주 최시형을 지목해서 체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동학 조직은 궤멸되었다.


2. 북접 농민군의 최후와 북실전투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남북접 연합 농민군은 남부 지역으로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