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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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朝鮮後期)의 보은

〈제도의 개편〉

1. 1.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북벌을 계획하는 상황에 이르러 보은현감 이하악(李河岳)이 부임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동법이 호서지방에 실시되고 중앙의 군사제도 개편에 따른 새로운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대동법은 공물(貢物)을 납부하는 제도를 개혁한 것으로서 당초 품목별로 정해진 수량만큼 매년 납부하는 공물은 운반도중에 썩거나 운반의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경주인(京主人)이라 불리우는 세력있는 사람들이 대신 납부하고는 시골에 내려와서 몇곱절로 받아내는 폐단이 대단하였다. 정부에서는 공물을 쌀로 대신 납부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이이(李珥) 등에 의해 제창된 이후 이원익(李元翼) 등에 의해 대동법의 시행이 강력히 주장되었다.

왜란 이후 공물을 수납하는 장부인 공안(貢案)이 문란해 있어서 다과(多寡)가 균등하지 못하고 향리들의 부패로 백성들이 매우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토지를 가지지 못한 농민도 호(戶)를 구성하면 공물을 납부할 의무가 있었던 폐단을 고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 공물대신 미(米)‧포(布)‧전(錢)으로 납부하면 중앙에서 정부의 각 부서에서 필요한 물자를 전문적인 공납업자인 공인(貢人)을 통해 조달받는 방법이었다. 당시 영의정 김육(金堉)의 강력한 주장으로 먼저 호서지방에서 실시하였던 것이였다.

보은과 회인에 있어서의 대동법에 의한 공가미포(貢價米布)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대략 18세기 중엽인 1759년(영조35)의 기준으로 보면 보은의 호구(戶口)는 4547호, 인구는 14,492명이었고, 회인은 964호 2,854명으로 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 등을 납부하였으나 토지를 가진 농민에게 대부분의 세(稅)가 집중되고 또 아직 별공(別貢)이 진공(進貢)이라하여 남아있는 상태였다.

진공은 토산물을 월령(月令)에 따라 바치던 것으로 현물로 바쳤는데 보은과 회인에서 내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① 보은은 영동과 함께 3년에 두 번 산돼지 한 마리씩
② 정월에는 보은에서 청밀(淸蜜:꿀)3승(升)‧백급(白芨:대왕꿀)3양‧태수(胎水)1합(合)
③ 2월에는 회인에서 청밀(꿀)2승
④ 3월에는 보은에서 백출(白朮)3양5전‧길경(桔梗:도라지)10양‧황백피(黃栢皮)6양‧전호(前胡)9양‧백급(白芨)2양‧진령(蓁笭)10양‧모향(茅香)8근6양을, 회인에서는 모향(茅香)8근6양‧전호(前胡)1근5양‧길경(도라지)9양‧진피(陳皮)10양‧백급2양‧건지황(乾地黃)2양
⑤ 6월에는 보은에서 금은화(金銀花)3양‧봉리괴(封裏槐)1좌
⑥ 7월에는 보은에서 안식향(安息香)1근14양‧백급(白芨)3양‧태수(胎水)2합, 회인에서는 안식향 1근5양‧백급2양4전‧태수1합‧청밀2승
⑦ 8월에는 보은에서 대추2두
⑧ 9월에는 보은에서 청밀5승
⑨ 10월에는 보은에서 전호11양‧오미자5양8전‧금은화1양, 회인에서 대추1두5승‧전호14양‧산악(山嶽)5양8전‧유지(油紙)1장(張)
⑩ 11월에는 보은에서 오가피11양‧위령선6양‧연혈(蓮趐)4전
⑪ 진하진상(陳賀進上)으로 보은에서 대추2두‧산꿩6마리, 회인에서 대추2두2승‧마른꿩4마리
⑫ 도계진상(到界進上)으로 보은에서 잣6두6승, 회인에서 꿀1승2합‧산꿩3마리

이상에서 보듯이 토산의 공물은 아직도 큰 부담이었다. 위에서 특히 진하진상은 조정에서 청(淸)에 보내는 진하사(陳賀使)라는 사신을 보낼 때 진상한 것이고, 도계진상은 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 접대용으로 바치는 공물로 이때 대추와 꿩과 잣이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화와 보은〉

1. 원(院)‧사(祠)의 증가와 훼철

16세기는 문화‧사상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하나의 큰 변혁기였다. 불교를 대신하여 새왕조의 지도원리가 된 성리학은 적어도 15세기 동안은 일정한 기능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의 불교적 생활양식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는 데 현실적으로 작용하였으며 의리(義理)정신을 내세워 집권사대부층의 귀족화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왕권강화도 일정한 한계에서나마 억제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 등 사회적, 경제적 제도개혁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면서 왕조초기의 지배체제 확립에 일정한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화(士禍)가 연속되고 특히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유교적 지치주의의 이상이 좌절됨에 따라 성리학의 현실적 기능이 약화되고 반대로 형이상학적 관념론적 이기론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성리학 기능의 변화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서원과 향약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서원의 발생은 성리학 성격변화의 뒷받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상호 연관관계가 있는 당쟁의 후방기지적 역할도 다했다.

초기의 서원중 유명한 것은 1543년(중종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의 고향인 풍기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후 명종 때 이황(李滉)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과 서적(書籍)‧전토(田土)‧노비(奴婢)가 하사되어 면세혜택을 주니 소위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였다. 이후 서원이 계속 증가되어 영조때 6백여개나 되어 그 폐가 컸으며 흥선대원군이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보은지방에는 1555년(명종10) 보은현감 성제원(成悌元)이 지방 사림의 공의로 삼년성안에 서원을 창건하여 김정(金淨)을 봉안하고 삼년성서원(三年城書院)이라 하였는데 1610년(광해군2)에 「상현(象賢)」이라는 사액을 받으니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창건된 서원이었다. 1681년에는 성제원(成悌元)과 조헌(趙憲)을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상현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1871년(고종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강당은 보은향교로 옮기였다. 1876년에 다시 재건하여 현재 충청북도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보은지방에 건립되었던 원(院)‧사(祠)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후율사(後栗祠) : 수한면 차정리 1832년(순조32)에 창건된 것으로 1868년(고종5)에 조령(朝令)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894년(고종31)에 재건된 것이다. 조헌(趙憲)등 21현(賢)을 봉향
② 금화서원(金華書院) : 삼승면 선곡리 1814년(순조14)에 창건된 것으로 1871년(고종8) 훼철되었다가 1917년에 재건된 것이다. 최운(崔澐)등 5현을 배향
③ 백봉사(栢峯祠) : 보은읍 산성리 1868년(고종5)에 창건된 것이다. 이천계(李天啓)를 배향
④ 병산원(屛山院) : 1737년(영조13)에 마로면 기대리에 창건하였다가 1801년(순조2)에 구병산 아래로 이건하였으나 1871년에 훼철되었다. 김자수(金自粹)등 5현을 배향하였다.
⑤ 탁청사(濯淸祠) 1869년(고종6)에 보은읍 어암리에 창건하였으나 1871년 훼철되었다. 김상진(金相進) 등 3현을 배향하였다.
⑥ 산앙사(山仰祠) 1707년(숙종33) 삼승면 서원리에 창건하였다가 1871년 훼철되었다. 송시열(宋時烈)등 3현을 배향하였다.


2. 보은향약(報恩鄕約)의 시행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농민들은 군역(軍役)‧환곡(還穀)‧사채(私債)의 과도한 부담으로 농민의 농토이탈이 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였다. 이같이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수령들은 향약을 실시하여 농민의 토지이탈, 신분제의 동요 등을 막고 농민들을 각각 향촌사회에 바짝 얽어매고 그들을 농업공동체적인 결합관계로 결속하므로서 조세원을 확보하고 그들에게 권농을 강조함으로써 최소한의 농촌 경제를 안정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필요성에 의하여 18세기에 들어와서 각 주현(州縣)의 수령들이 다투어 향약을 제정하고 시행하게 되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향약이 보은향약이다.

보은향약은 보은군수로 1746년(영조22) 4월부터 1750년(영조26) 4월까지 만 4년간 재임한 김홍득(金弘得)이 1747년(영조23) 9월 15일에 입약하여 시행한 것이다. 김홍득은 서문에서 율곡(栗谷)이 청주에서 시행한 「서원향약」을 주로 하여 당시 향촌사회의 풍속을 참작하고 마침 새로 반포된 「정경(政經)」의 내용과 취지를 향약에 많이 반영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정경」은 송(宋)의 진덕수(眞德秀)가 정사(政事)를 하는데 상경(常經)이 되는 원칙과 수령들의 임무를 설명한 책으로 보은향약을 만든 해인 영조23년 정월에 왕명으로 예문관에서 간행한 것이다.

향약은 「향약서(鄕約序)」「향약조목(鄕約條目)」「향약후부록(鄕約後附錄)」「별록유민인(別錄諭民人)」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향약조목은 다시〈조목(條目)〉〈향회독약법(鄕會讀約法)〉〈시벌지예(施罰之例)〉로 나누어져 있다. 〈향약조목〉〈향약독약법〉은 주로 「서원향약」을 반영하고 〈시벌지예〉「해주일향약속」을 가감하여 향촌사회에서의 양반토호 향리들의 비리를 규제하고 있다. 〈별록유민인〉등은 농민들에게 수이(遂利)를 경계하고 권농의 필요성과 소농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도를 자세히 설명하여 농업공동체적인 생활을 권장하고 있다.


3. 조선후기 보은의 생활상

보은과 회인은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청주목(淸州牧) 관할로서 현감은 종6품의 음보(蔭補)였다. 현감은 왕을 대신하여 관할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 이미 조선초기부터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7가지 직무가 있었다. 현감 아래로는 수령을 보좌하는 향청(鄕廳)이 있어서 좌수(座首)1인과 별감(別監)2인이 있었는데 회인은 별감이 1인이었다. 행정을 맡은 군관(軍官)‧아전(衙前)‧지인(知人)‧사령(使令)과 관노비(官奴婢)가 있었다. 군관은 보은현에 20인 회인현에 8인이 있었는데 보은의 1871년에는 4인으로 나타나 있어서 시기에 따라 인원수가 변하였던 듯하다. 군관은 고을의 치안‧호송‧의장‧수비를 맡고 있었다. 아전과 지인은 고을의 행정을 담당한 실무자이며 중앙정부의 6조(六曺)를 모방하여 6방(房)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지바의 향리로서 신분이 세습적이고 지식과 기능도 전문화되어 있었다. 이(吏)‧호(戶)‧예(禮)‧병(兵)‧형(形)‧공(工)의 6방 가운데 호장(戶長)‧이방(吏房)‧수형방(首形房)을 특히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였고 현감이 부재시에는 호장이 총책임자였다. 보은현은 아전 30인과 지인25인, 회인현에는 아전 14인과 지인9인이 있었다.

호구(戶口)의 상황을 보면 당시 가장 큰 중심지인 관아의 소재지와 읍내는 200호 전후의 취락에 불과하고, 리에서 큰 규모가 80~90호 작은규모는 10미만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또한 어려운 농민생활의 구휼(救恤)을 위하여 환곡(還穀)이 시행되었다. 이는 봄에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후인 9월에 창고에 수납하게하는 것이었는데, 보은의 경우 18세기 후반에 쌀 1,284석(石) 6두(斗)와 피곡(皮穀) 9,132석 11두, 그리고 영진곡(營賑穀)이 1,517석 8두의 양곡이 이에 해당되었다. 회인현은 회부미(會付米) 111석, 피곡(皮穀) 408석과 진곡(賑穀) 200석, 영곡(營穀) 2석, 피곡(皮穀) 456석으로 10월에 개창(開倉)하여 12월에 봉창(封創)하도록 되어있었다.

16세기 이후로 물화의 유통이 활발하여졌으나 17세기 이후 대동법의 실시로 말미암아 화폐경제로의 가속도가 붙었다. 지방의 주요도시에는 전업적인 상품교환을 직업으로 하는 상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행위는 상설시장이 아닌 정기시장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회인은 18세기 후반에 두산시(斗山市)가 북면에서 열렸는데 3일과 8일이 개시일이였다는 읍지의 기록으로 보아 읍내보다 먼저 생긴 듯하다. 1860년대에 회인은 읍내의 장이 4일과 9일, 두산의 장터가 3일과 8일에 열리고 있었다. 보은에서는 읍내가 5일과 10일, 원암(元岩)장이 2일과 7일, 관기장이 1일과 6일, 마로장이 4일과 9일열렸다. 이를 보면 당시 초하루에서 열흘까지 두 번씩의 장이 열리므로 그 돌아가는 순서는 ①관기장 ②원암장 ③두산장 ④마로장‧회인장 ⑤보은장의 순서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와 이웃한 회남‧안내‧안남‧청산‧화령‧미원 등지와 연접되어 교역이 활성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