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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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보은 (삼년군)

1.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개편과 삼년군(三年郡)의 설치

삼국통일 후 신라의 영역은 3배로 확대되었다. 당시 통일신라의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갑자기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어떻게 통치하느냐 하는 일이다. 그러한 조치로 나타난 것이 9주(州) 5소경(小京)제도의 확립이요 군사제도의 정비라고 할 수 있다.

9주 5소경 제도는 신문왕(神文王) 7년(687)에 완성이 되었고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는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한자명칭으로 개칭하였다. 주의 장관을 처음에는 군주(軍主)라 불렀으나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는 총관(摠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785)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다. 이느 주의 장관의 성격을 종래의 군시 중심에서 행정관료의 성격으로 변모되었음을 뜻한다.

현재의 보은군은 상주(尙州)에 속했으며, 보은군 회북면(懷北面)일대는 웅주(熊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州) 밑에는 군(郡)을 두고 그 아래에는 현(縣)을 설치하였다. 군(郡)에는 태수(太守)가, 현(縣)에는 현령(縣令)이나 소수(小守)가 파견되었다. 현재의 보은군은 신라시대의 삼년산군을 경덕왕(景德王) 16년(757) 12월에 단행된 한자명칭 변경조치에 따라 삼년군(三年郡)으로 개칭하였으며 상주(尙州)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회북면 지역도 백제시대의 미곡현(未谷縣)을 경덕왕대에 매곡현(昧谷縣)이라 하여 웅주(熊州)에 속하게 하였다.


2. 김헌창(金憲昌)의 난(亂)과 삼년산성 전투

오늘의 날의 삼년산성은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 14년(822)에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으로서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군(軍)과 정부군이 서로 맞서서 크게 싸웠던 격전지로 알려진 곳이다. 당시 김헌창군의 거점이었던 웅천주(熊川州)(공주)와 서원경(西原京)(청주)을 비롯한 충청도 지방은 반군의 장악 하에 놓여 있었으나, 이 전투를 계기로 정부군은 반군의 예봉을 꺾을 수 있게 되었다.

김헌창의 난은 왕위계승과 관련 그의 부친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왕권과 귀족세력들 간의 대립에서 빚어진 정치적 갈등의 소산이었다. 김헌창은 헌덕왕 14년(822) 3월 중앙정부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고 국가를 세워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개전초에는 김헌창군이 신라 9주 5소경 중에서 5주 3소경을 장악하여 지금의 충청, 전라, 경상도의 광범위한 지역이 가담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으로 확대되었다.

관군은 장웅(張雄)을 선발대장으로 반군의 경주로의 진출을 막도록 하였다. 장웅(張雄)의 선발부대는 도동현(道冬峴)(영주)에서 처음으로 반군과 접전을 벌여 이를 격파하였고 후에 도착한 본대와 합류하여 다시 보은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반군을 격파하였고 여세를 몰아 속리산 방면을 진출하여 반군의 한 부대를 섬멸시켜 반군의 예봉을 꺾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3군의 주력부대는 성산(星山)(성주)에서 반군을 격파한 후 다른 토벌부대와 함께 반군의 거점인 웅진성(熊津城)(공주 공산성)을 포위 공격한지 10여일이 지나서 김헌창이 자살함으로써 반란은 마침내 진압되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당시 관군의 주 공격로를 이 전투의 분수령이 되었던 삼년산성과 속리산 전투를 기준으로 경주에서 삼년산성까지 공격루트를 살펴보면 도동현(道冬峴)과 성산(星山)에서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주(慶州)→영천(永川)→성주(星州)→상주(尙州)→화령(化寧)→관기(官基)→보은(報恩)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거쳐왔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보은 삼년산성에서 반군의 거점인 공주(公州) 공산성(公山城)까지의 관군의 공격로는 삼년산성(三年山城)→원남 안내산성(元南 安內山城)→옥천 서산성(沃川 西山城)→마전(馬田)→진산(珍山)→연산(連山)→석성(石城)→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의 루트로 추정된다.


3. 법주사(法住寺)의 중창(重創)

법주사가 자리잡고 있는 속리산은 신라 때에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불렀으며 국가적 제사인 중사(中祀)와 소사(小祀)에 해당되는 곳이기도 하다. 속리산에는 많은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중에서 법주사(法住寺)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 일컬을 정도로 속리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거대한 청동 미륵불상과 팔상전 및 쌍사자석등 등 중요한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 곳이다. 특히 미륵불상은 법(法)이 머문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법주사의 상징이며 원대한 자비를 베푸는 그러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중심지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법주사의 창건된 시기와 유래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구전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14년(553) 창건설 이다. 즉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인도에 가서 불법을 익힌 후에 불경을 흰 노새에 싣고 돌아오던 중 속리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노새가 더 이상 나가지도 않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산세를 보니 좋고 도장(道場)도 넓어 결국 이곳에 머물러 절을 지었고 법주사라 하였다 한다.

다른 하나는 8세기 후반경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인 영심(永深) 등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진표(眞表)는 고된 수행의 결과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占察經)》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받고난 후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다. 그는 다시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을 향해 가던 도중 소달구지를 만났는데 소가 진표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기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찌하여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진표는 「내가 계법(戒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다 듣고 나서 말하되 「짐승도 이러한 신념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신념이 없겠습니까?」라 하고 낫을 쥐고 스스로 머리칼을 잘랐다. 이에 진표는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戒)를 주었다.

진표는 속리산 골짜기 속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그 곳에 표시해 둔 다음 훗날 대덕(大德) 영심(永深)에게 「속리산으로 돌아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교법에 따라 중생을 제도(濟度)하라」일렀다. 이에 영심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초(吉祥草)라 하고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령(占察法令)을 열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법주사의 유물인 석연지(石蓮池),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등은 그 양식적인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인 8세기 성덕왕(聖德王) ~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법주사 경내의 배수로 공사 때에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물자료를 통해 보면 법주사는 6세기경에 소규모 사찰로 창건되었으나 미륵신앙의 도장으로 중창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8세기경의 일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법주사의 미륵신앙은 이 절의 중흥에 큰 기여를 한 진표(眞表)와 그의 법제자인 영심(永深)에 의해 발현되었던 것이다. 미륵신앙은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상생신앙(上生信仰)과 전륜성왕의 치세(治世) 때에 하생(下生)한 미륵의 설법으로 구제되기를 바라는 하생신앙(下生信仰)으로 나뉘어진다. 통일 이전의 신라에서는 전륜성왕설과 결부되어 미륵하생신앙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통일 이후 법상종(法相宗)의 주불(主佛)로서 승려와 상층인을 위한 미륵상생신앙과 내서적인 성격을 가진 일반 대중을 위한 아미타(阿彌陀) 정토신앙(淨土信仰)이 행해지게 되었다.

현재 법주사의 미륵불상이 위치한 곳이 옛 산호전(珊瑚殿) 용화전(龍華殿)의 터이다. 용화전에는 금신장육미륵상(金身丈六彌勒像)이 봉안되었고 그 전당의 규모도 중층건물로 35칸이 될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하였다. 법주사는 금산사(金山寺), 동화사(桐華寺)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법상종의 사찰로서 번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