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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의 보은

1. 보은의 호족세력 - 매곡장군(昧谷將軍) 공직(龔直)

나말‧여초(羅末‧麗初) 즉 신라말기 진성여왕대(眞聖女王代)인 880년부터 고려초기인 930년대까지 약 반세기 동안은 “호족(豪族)의 시대(時代)”라고 일컬을 만큼 지방에 일정한 기반을 가지고 정치‧군사적으로 큰 비중을 가지고 있던 지방 세력가 호족(豪族)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크게 활약한 때였다.

후삼국기에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와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호족세력의 지배권이 오히려 강하게 잔존하고 있었고, 후백제나 고려에서 이곳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에는 호족세력이 향배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신라말 매곡(昧谷)(회인) 출신인 공직(龔直)은 이곳을 지배하는 호족으로 성장하여 ‘성주’ 또는 ‘장군’으로 자칭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후백제의 견훤의 지배하에 있다가 후에 고려 왕건에 투항함으로써 중서부 일대의 전세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다.

그의 세력 근거지인 매곡현(昧谷縣)이 당시 견훤과 왕건세력의 각축장이었던 중북부의 접경지역이었을 뿐아니라 공직이 이들 세력 사이에서 교묘한 처신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대‧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특이한 존재로 주목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창건하는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후백제는 이미 918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궁예의 세력권이었던 충청도지방에까지 그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 시기에 공직은 견훤에게 귀부(歸附)하여 큰아들 직달(直達)과 둘째 금서(金舒)와 딸을 견훤에게 질자(質子)로 보내며 후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편 자신의 처남이 경종이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왕건에 의해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공직은 견훤에 더욱 접근할 필요를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930년을 전후로 하여 대세가 역전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과 왕건이 직접 정예부대를 이끈 930년 1월 고창(안동)전투인데 후백제군의 대패로 끝났다. 932년 6월 공직은 견훤과의 관계를 버리고 직접 개경에 와서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공직의 입장에서는 매곡현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왕건의 입장에서는 유동적이었던 보은‧청주‧문의 등 중서부지역의 쟁패에 우위를 차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왕건은 공직에게 대상(大相)을 제수하고 백성군(白城郡) 안성(安城) 땅을 녹읍(祿邑)으로 주고 고려의 귀족인 준행(俊行)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2.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의 대결장 - 삼년산성 전투

고려는 건국과정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후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충북일대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925년 10월에 고려 유검필(庾黔弼)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삼아 후백제 영향권에 있던 연산군(燕山君)(문의)과 임존군(任存郡) 대흥(大興)을 공략하여 후백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3천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926년 4월에 견훤은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웅진(熊津)으로 진군하게 되는데 그 결과 웅주(熊州)(공주), 운주(運州)(홍성) 등 중서부 일대의 10여개 주현이 후백제의 영향권 내에 들어갔다. 이후에도 중서부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양측간의 접전이 계속되는데 927년 3월에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運州)를 공략하였고, 928년 7월에는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곧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후백제군은 삼년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청주까지 쳐들어갔으나 왕건은 유검필 군대의 도움으로 후백제군을 청주에서 퇴각시킬 수 있었다.

928년까지만 해도 고려측의 전세는 연산진 전투를 제외하고 삼년산성‧청주, 죽령 일대에서 매우 불리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내분을 겪게 되는 930년 이후 후백제의 중서부 일대의 지배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 해 8월에 고려가 천안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고, 또 청주에 행차하여 청주나성을 축조함으로써 그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고려군의 전세역전은 무엇보다도 매곡성주(昧谷城主) 공직의 귀부(歸附)가 결정적인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중부일대가 고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공직이 귀부한 직후 932년 7월에는 왕건 자신이 일모산성(一牟山城)(문의)을 정벌하였고, 이어 934년에는 웅주(熊州)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던 것이다.


3. 행정구역(行政區域)의 정비(整備)와 보령군(保齡郡)의 설치

고려왕조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지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成宗) 2년(983) 12목(牧)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데, 이 12목(牧) 중에 충북에는 충주(忠州)와 청주(淸州)가 포함되었다. 이어 성종(成宗) 14년(995)에는 지방 행정구역의 최고단위인 도제(道制)가 신설되었는데, 지금의 충청북도는 10도 중 중원도(中原道)에 해당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지방제도는 완성을 보게 되는데, 전국을 개성부와 경기(京畿) 및 오도 양계(5道 兩界)로 나누고 그 밑에 500여개의 도호부(都護府)‧목(牧)‧주(州)‧부(府)‧군(郡)‧현(縣)‧진(鎭)을 소속시켰다.
지금의 충청북도는 대체로 양광도(楊廣道)에 속했는데, 때로는 충청도(忠淸道)라는 명칭이 쓰여지기도 하였다.

현재의 보은군은 고려초 태조 23년(940)에 이르러 종래 신라 경덕왕대에 붙여진 삼년군(三年郡)을 보령군(保齡郡)으로 개칭하였고, 지방행정구역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현종(顯宗) 9년(1018)에는 상주목(尙州牧)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현재 보은군에 소속되어 있는 회북면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신라시대 연산군(燕山君) 영현(領縣)이던 매곡현(昧谷縣)을 회인현(懷仁縣)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청주목(淸州牧) 관할로 되었다. 그 후에 회덕(懷德)의 감무(監務)가 겸임을 하다가 우왕(禑王) 9년(1383)에 별도의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렸다.


4.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보은

홍건적(紅巾賊)은 원말(元末)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일으킨 유적으로서, 머리에 붉은 건(巾)을 두른 까닭에 ‘홍건적’이라 불리웠다. 이들이 원군(元軍)의 공격을 받고는 고려로 밀려 들어와 두 차례에 걸쳐 전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홍건적의 1차 침입은 공민왕(恭愍王) 8년(1359) 12월,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계속 남하하여 서경(西京)을 점령하고 용강(龍岡)과 함종(咸從)까지 진출하였으나 반격에 나선 고려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였다. 이렇게 1차 침입에 참패를 당한 홍건적은 다시 재침을 기도하는데 공민왕 10년(1361) 10월 반성(潘誠)‧사류(沙劉) 등이 10여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11워 중순에는 개경의 중요 방어선을 돌파하고 하순에는 왕도 개경을 점령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부득이 복주(福州)(안동)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1362년 정월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최영(崔營)‧이성계(李成桂) 등에게 천수사(天壽寺)에 모이게 하여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마침 눈이 내려 적의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고려군이 급습하여 적장 사유(沙劉) 등 10만에 가까운 적도들을 섬멸하였다. 이에 홍건적은 수 많은 시체와 병기를 남긴 채 압록강을 건너 도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려군이 왕도 개경을 수복할 무렵 공민왕은 1362년 2월 25일 행재소(行在所)인 안동을 떠나 상주를 지나 관기에서 약 4개월간 머무르다가 8월 13일 원암을 거쳐 8월 15일에는 속리사(俗離寺)에 행차하여 통도사(通度寺)의 소장품인 불골(佛骨), 사리, 가사(袈裟)를 살핀 기록이 있다. 다시 원암―보은―회인을 거쳐 청주에서 도착한 이후 이곳에서 환도의 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어가가 상주에서 보은을 거쳐 청주로 환도하는 길에 마로면(馬老面) 관기리(官基里)에서 약 4개월간 묵고간 사실이 전해오고 있다. 현재 마로면 큰말에서 송현리(松峴里) 웃솔고개로 넘어가는 고개를 “왕래재”라 부르고 있는데, 공민왕이 상주에서 이 고개를 넘어 관기에 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또 왕은 이곳에 머물면서 앞 산에 곡식을 저장할 창고도 짓고 죄수를 다스릴 감옥도 만들도록 하였으며 성도 쌓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원앙골”은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며, “옥갈머리”는 바로 옥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로면의 소재지를 관기(官基)라 부르는 것은 공민왕이 명명한 관기(舘基)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