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면(懷南面)
금곡리(金谷里)
1. 위치
면적 2.02㎢, 인구 40가구 88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2.2㎞ 지점인 동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회북면(懷北面), 서는 거교리(巨橋里), 남은 조곡리(鳥谷里), 북은 신추리(新秋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쇠가 많이 났으므로 쇠실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승동(地承洞)을 병합하여 금곡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깨박-골[마을] 쇠실 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깨를 많이 갈았다고 함.
- 느트-정[마을] 쇠실 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다고 함.
- 쇠-실(金谷)[마을] 금곡리의 중심마을. 국사봉에서 파낸 쇠를 이곳에서 구워냈다고 함.
- 스승-골(師谷里. 地承洞 )[마을] 쇠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 이 곳에 절이 있었으며 중이 많았다고 함.
- 양지-뜸[마을] 쇠실 통뫼산소를 중심으로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웃-말[마을] 쇠실 중앙 네거리를 중심으로 위쪽에 있는 마을.
- 음지-뜸[마을] 쇠실 통뫼 산소를 중심으로 음지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가래울-고개(楸領)[고개] 쇠실에서 신추리로 넘어가는 고개.
- 고개-밑[골] 쇠실에서 신추리로 넘어가는 골짜기. 가래울고개 아래가 됨.
- 국사-봉(國師峰:552m)[산] 금곡리 동쪽에 있는 산. 회북면과의 경계에 있으며 정상에 돌무더기가 있음. 옛회인현의 명산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산의 정상은 큰 명당자리라하여 조상의 묘를 만들면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귀하게 되나 그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고 그 가물은 파묘하고 기우제를 지내야만 비가 온다고 함. 이와 같은 설에 따라 가문의 번성과 부귀를 노려 조상의 묘를 만들려는 사람과 가뭄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분쟁이 여러번 있었다고 함.
- 느트정-골[골] 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다고 함.
- 돼지-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웃말 위쪽에 있으며 옛날 산돼지가 많았다 함.
- 두루-봉[산] 아랫말 뒤에 있는 산. 산봉우리가 밋밋하고 동글게 생겼음.
- 뒷-날[등] 쇠실 동쪽에 있는 등성이. 국사봉의 한 줄기임.
- 마당-재[산] 쇠실 동북쪽에 있는 산. 마당처럼 편편함.
- 막은-골[골] 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물건너 거교리에서 바라보면 골짜기 안을 꽉 막은 것처럼 보인다고 함.
- 매봉-재[산] 쇠실 동남쪽에 있는 산. 이 곳에서 매 사냥을 많이 했다고 함.
- 문층묏-날[산] 쇠실 남쪽에 있는 산. 문층의 묘가 있다 함.
- 뭉치미-날[산] 쇠실 남쪽에 있는 산
- 배나무-골[골] 쇠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수백년 묵은 배나무가 있다고 함.
- 불당-골[골] 쇠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다 함.
- 삼박-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서고개-골[골] 스승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스승골에서 쇠실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음.
- 서낭댕이-고개[고개] 쇠실에서 스승골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었음.
- 스승-골(師谷)[골] 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스승골 마을이 있음.
- 승곡-교(承谷橋)[다리] 스승골 서쪽에 있는 철근콘크리트다리. 1980년에 가설 되었음.
- 안산넘어-골[골] 스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우담탁-골[골] 쇠실 양지뜸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우담이라는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함.
- 음지뜸-도랑[내] 국사봉에서 쇠실 음지뜸으로 흘러 내리는 개울.
- 작은-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중-뫼(中山)[산] 쇠실 양지뜸 북쪽에 있는 산. 높이 232m. 옛 회인현 고을 중심에 있다하여 ‘중뫼’라 불렀다고 함.
- 큰-골[골] 쇠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통뫼-산소[묘] 쇠실입구에 있는 묘.
- 푯대-날망[산] 쇠실 북쪽에 있는 중뫼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일제시대 세부측량시 푯대를 꽂았다고 함.
5. 문화유적
- 추양정사(秋陽精舍)
금곡리 마을 입구에 있는 어당(峿當) 이상수(李象秀)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 본래 1911년 어당의 제자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가 스승의 옛 집터인 신추리에 건립하고 스승의 영정을 봉안하였다가 뒤에 박문호, 양주승(梁柱承), 양주학(梁柱學), 박용호(朴龍鎬), 박순행(朴洵行), 양주하(梁柱河)의 영정을 추가로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다가 1995년 3월 이 곳에 정면 3칸, 측면 1칸 홀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 집을 신축하고 영정을 이전 봉안하였다. 정면에 “秋梁精舍”라 편액하고 앞에 일각문이 있다. 주위는 시멘트 담장으로 둘렀다.
- 송석정(松石亭)
금화(金華) 양주승(梁柱承)이 마을앞에 세운 정자로 여름철에 문인들과 시를 읊으로 피서하며 즐겼던 곳이였으나 건물은 없어졌다.
- 남면장양종환송덕비(南面長梁宗煥頌德碑)
회인군 남면장 양종환 송덕비로 1890년에 세움.
- 효열부영산신씨소성여사기적비(孝烈婦靈山辛氏小成女史紀蹟碑)
양주화(梁柱華)의 처 신소성(辛小成 1868~1951)여사의 효와 열을 기리는 비로 1992년 5월 10일 건립되었다.
6. 집성
- 집성남원양씨(南原梁氏)
남원군(南原君) 성지(誠之)의 후예로 20여호가 거주하고 있음.
7. 산업
고추, 마을, 잡곡.
8. 전설
- 국사봉 돌무더기
이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그 산 정산부근은 굉장한 명당자리라 한다.
옛날 이 명당에 묘를 만들면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귀하게 된다고는 하나 그 산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고, 그 가뭄은 묘를 파내어 기우제를 지내야만 비가 온다는 말하자면 이율배반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 산으로 집안의 번성과 부귀를 노리고 이 산에 조상의 산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과 가뭄을 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여러번 있는 산이기도 하다.
o옛날 고려 때 지금의 회남면 금곡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외딴집에 어느 과부가 두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부의 두 남매는 얼마나 용맹스럽고 날렵한지 몰랐다. 그뿐 아니라, 두 남매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 비록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사는 과부지만, 두 남매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 비록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사는 과부지만 두 남매만 보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부에게는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밤마다, 이 산의 신령이 나타나서는 남매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신령이 나타났다. 신령은 매우 노하였고 큰 호령으로 꾸짖기 시작하였다. “남매가 너무 비범해 둘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천기를 다스릴 수 없을 터인즉 더 이상 주저하면 하늘의 노여움이 크리라”는 것이었다. 과부는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남매를 앞에 앉혀 두고 어려운 내기를 시켰다. 내기에서 지는 똑은 희생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과부는 아들에게 나막신을 신고 당나귀를 끌고 하루 아침에 서울을 다녀오고 딸에게는 앞치마로 돌을 날라 10리 밖에 있는 매곡산에 성을 쌓도록 하였다. 이제 딸은 한번만 앞치마에 돌을 가지고가 성을 쌓으면 다 쌓게 되는데 아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내기에서 아들이 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나라 어머니들의 생각인지라 과부는 딸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과부는 딸의 앞치마를 딸이 알지 못하도록 찢어놓았다. 딸은 자기보다 더 큰 돌을 굴리고 성을 쌓느라고 손바닥에 피가 흐르고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오빠에게 질세라 열심히 돌을 주어 앞치마에 담았다. 그리고 매곡산을 향하여 가려하자, 돌이 우그르 쏟아졌다. 어머니가 앞치마를 찢어 놓은 것을 모르는 딸은 쏟아진 돌을 다시 주워담았고 걸음을 옮기려면 돌이 쏟아지고 그렇게 하는 중에 아들이 돌아왔고 내기에 진 딸을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 산정에 있는 돌무더기는 바로 딸이 쏟아논 돌들이었다.
9. 기타
1991년 10월 6일 마을 입구 도로변에 유래 자랑비를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