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면(懷南面)
조곡리(鳥谷里)
1. 위치
면적 2.86㎢, 인구 40가구 106명(1999년말). 면 소재지로부터 1㎞ 지점인 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수한면(水汗面) 노성리(老城里), 서는 거교리(巨橋里), 남은 판장리(板藏里), 북은 금곡리(金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회인군(懷仁郡) 남면(南面)의 지역으로서 국사봉(國師峰)과 호점산성(虎岾山城)사이가 되므로 새실 또는 조곡(鳥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곡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고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45년에 면사무소가 신곡리로 이전되고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일부가 수몰되었다.
3. 자연마을
- 마전-사(麻田寺)[마을] 새실 동쪽에 있는 마을. 조곡 2리임.
- 새-실(鳥谷)[마을] 조곡리의 중심 마을 조곡 1리임. 마을 형상은 돼지가 누워 9마리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이라 하며 전면에서 보면 새조(鳥)자 모양을 하고 있다 함. 조선시대 이곳에서 생산된 담배(南靈草)가 유명하였다고 함.
4. 기타지명
- 가는-골[골] 마전사 남쪽 구수샴골 밑에 있는 골짜기. 골이 가늘고 깊음.
- 건너-들[들] 새실 남쪽에 있는 들. 마을 건너편에 있다하여 ‘건너들’이라 함.
- 굽은-딩이[모롱이] 마전사 입구에 있는 모롱이.
- 구수샴-골[골] 마전사 남쪽에 있는 골짜기, 구유처럼 생겼다 함.
- 남산-골(南山谷)[골] 마전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느름싱이[산] 새실 동남쪽 여수구미 건너편 음달쪽에 있는 산.
- 달기-봉[산] 마전사 서쪽에 있는 산.
- 도람-말[모롱이] 새실에서 판장리로 돌아가는 길 모롱이.
- 독박-골[골] 마전사 서쪽, 방아다리 뒤에 있는 골짜기. 밭에 잔돌이 많음.
- 동대-골[골] 구수샴골 옆에 있는 골짜기.
- 때-골[골] 새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매-봉[산] 마전사 동쪽에 있는 산. 매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함.
- 방아-다리[골] 새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생겼다 함.
- 벼락-바우[바위] 마전사 앞 길가에 있는 바위. 두 쪽으로 갈라졌음.
- 산-건너[산] 새실 남쪽에 있는 산.
- 새-청[산] 세실 서쪽 마을 입구에 있는 산. 예부터 관청의 새청사가 들어설 곳이라 하여 ‘새청’이라 불렀다고 함. 대청댐 담수로 회남파출소가 이전되어 왔다.
- 서-고개[고개] 마전사 입구에 있는 고개.
- 아리랑-고개[고개] 마전사에서 구수샴골로 넘어가는 고개. 빙애를 끼고 돌아가게 되어 있음.
- 아망-골[골] 새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여수-구미[산] 새실 동남쪽에 있는 방아다리 밑에 있음.
- 은행-나무[나무] 마전사에 있는 나무. 수령 약 600년 이상으로 추측됨.
- 이팥-재[고개] 마전사 동쪽에 있는 고개. 아리랑 고개 밑에 있음.
- 잿-마당[고개] 새실서 금곡리 스승골로 넘어가는 고개.
- 찬물샘-께[샘] 아망골 안쪽에 있는 샘.
- 허궁-다리[골] 마전사 북쪽 국사봉 밑에 있는 골짜기. 방공호처럼 움푹 패인곳이 있음.
5. 문화유적
- 마전사지(麻田寺址)
마전사 마을에 있다. 창건년대는 미상으로 옛 지리지의 기록에 다르면 노성산(老城山)에 있다라고만 되어 있다. 현재 사지에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 2그루가 있고 동편 은행나무 앞으로 석축의 흔적이 일부 있으나 절터와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세조가 속리산에 순행할 때 이 절에서 3일간 머물면서 베옥을 빨아 말리고 사슴도 그냥하였다 하여 마록사(麻鹿寺)라고도 불렀다 하고 또 은행나무는 국난이 생길 징조가 있으면 ‘증․증’하고 울어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몇 년전까지 이 마을 사람들은 뒷산인 국사봉(國師峰:552m)에서 매년 정월 14일 산제를 올리고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려 마을의 보호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 국사봉 우단(國師峰雩壇)
마전사지 위쪽에 있었던 조선시대 회인현 기우제터다. 회인현 4우단 중 하나였다.
6. 집성
토착성씨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나 현재 10여 호만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7. 산업
미곡, 고추, 잡곡, 두류.
8. 전설
- 벼락바위
마전사의 주지승은 평소 열심히 도를 닦아 자신이 득도한 도술은 감히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하다고 자부했고 세상에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자신을 가질만큼 도술에 능통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절에 허름한 옷차림의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도승을 보니 눈빛이 찬란하고 온몸에 서기가 서려 있어 한 눈에 보아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지승은 이유없이 불쾌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주지승은 이 도승이 재주를 시험해 봄으로써 자신의 자괴지심을 풀어 보려고 마음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주지승은 도승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소승이 평소 요술을 익힌 바 있으니 한 번 구경을 하고 그대로 할 수 있으면 해 보시구료”했다. 이에 도사는
“소승은 본시 탁발만 하였을 뿐 배운 것이 없어 어찌 대사와 더불어 도술을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겸손하게 사양을 했는데도 주지승은 말은 듣지 않고 말을 끌어온 후 사뿐히 등에 올라타서는
“보시오. 내가 저 앞에 보이는 바위에 말을 타고 올라가서 재주를 부릴 터이니 객승도 한번 해보시구려”했다.
그런데 도승이 주지승이 가리키는 바위를 보니 그 바위는 용좌바위로 용궁에 있는 용왕이 일년에 한번씩 정월 대보름날 밖으로 나왔을 때 앉아 쉬는 자리였다.
“대사, 다른 재주는 다 하셔도 좋으나 저 바위 위에 올라가시는 일은 맙소서”하고 만류했다. 주지승은 매우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바위가 무슨 바위요?”하고 물어 보았다.
“무슨 바위인 줄은 스승이 알 수 없으나 보기에 매우 신성한 바위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르면 가만히 계시오. 쓸데없이 아는 체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요”하면서 주지승은 바위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도승은 만류할 수 없음을 알자 황급히 절안으로 도망치듯 숨었다.
“보기보다는 겁이 많은 중이구나” 주지승은 중얼거리며 단숨에 바위 위에 뛰어올라가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어지면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졌다. 하늘은 다시 쾌청해졌고 서쪽하늘엔 샛별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절에 숨어 있던 도승은 비로서 밖으로 나와 바위 있는 곳을 바라 보았다. 참으로 보기에도 처절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과 말이 바위와 함께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채로 두 동강이가 나 있었다. 도승은 두 손을 합창하며 주지승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중이 말타고 놀다가 벼락을 맞은 바위라 하여 “벼락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 은행-나무
옛날에 “마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암, 수의 두 은행나무가 있었다. 암나무는 절경내에 있었고 또 한그루(수컷)는 동구밖에 있었다고 한다. 이 두 나무는 서로 바라보며 때가되면 열매를 많이 맺어 큰 소득이 되었으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침 저녁으로 청소를 하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주지승은 절 경내에 서 있는 한 그루를 베어 버리면 청소하기에 용이하다고 생각하고 베도록 하였으나 행자승들이 일제히 반대를 하고 협조하지 아니하므로 손수 큰 톱을 갖다 대고 베기 시작했다. 행자승들이 반대를 한 것은 비록 낙엽질 무렵에는 온 사찰 경내가 지저분하지만 경내에 은행나무가 있어야지 경관에 어울린다고 베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주지승이 나무를 베기 시작한지 사흘만에 나무가 쓰러졌는데 그와 동시에 은행나무에서는 우유빛 백색물이 솟아나왔고 나무를 벤 주지승은 톱을 쥔 채로 현장에서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변고가 생기고부터 절은 퇴락하게 되었고 이곳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동구밖에 서 있던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도 한달 전부터 울었고 6.25동란 때는 약 1주일을 두고 마을이 울리도록 깊은 밤중에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나무는 나라에 변고를 미리 예고해 주는 신기한 나무로 여기고 있으며, 보은군 나무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9. 기타
1994년 12월 27일 새실 입구에 마을 자랑비를 건립하고 지방도 571호선변에 조곡리 마을 농산물 집판장을 개설 운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