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료집

보은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곳

마로면

마로면(馬老面)

1. 위치

면적 68.49㎢, 인구 1,351가구 3,881명(1999년말)
본군의 남부에 위치하며, 동은 상주시 화북면(尙州市 化北面), 남은 옥천군 청산면(沃川郡 靑山面), 서는 삼승면(三升面)과 탄부면(炭釜面), 북은 외속리면(外俗里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원래 보은군의 지역으로서 조선(朝鮮)때 역마(驛馬)를 먹이던 곳이므로 마로면(馬老面)이라 하여 한중(閑中), 백녹(白鹿), 변둔(卞屯), 세동(細洞), 갈전(葛田), 증산(甑山), 세중(世中), 내동(內洞), 오천(梧川), 금동(金洞), 모동(牟洞), 점동(店洞), 월남(月南), 대양(大陽), 성지(城池), 쌍암(雙岩)의 1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대양, 성지, 쌍암의 3개 리는 탄부면에 넘겨 주고 왕래면(旺來面)의 적암(赤岩), 임곡(壬谷), 갈평(葛坪), 송현(松峴), 수영(水永), 수문(水門), 방하(方下), 관기(官基), 사여(士餘)의 9개 리와 탄부면(炭釜面)의 기대(箕大), 상소(上所), 중소(中所), 하소(下所), 구암(龜岩) 5개리와 속리면(俗離面)의 불목리(佛目里)일부를 병합하여 한중(閑中), 변둔(卞屯), 갈전(葛田), 세중(世中), 오천(梧川), 원정(猿汀), 적암(赤岩), 임곡(壬谷), 갈평(葛坪), 송현(松峴), 수문(水門), 관기(官基), 기대(箕大), 소여(所餘)의 14개 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다.


3. 자연

본면의 북쪽은 면의 경계를 이루는 구병산(836m) 남쪽의 중앙부는 시루봉(505m) 서쪽은 삼승산(575m)을 중심으로 산지를 이루고 있으나, 수문리, 갈평리에는 보청천 상류가 형성한 산간 충적지가 수계를 따라 분포하고 있다.


4. 산업

논 730ha, 밭 607.8ha, 임야 4,912.3ha, 산간 충적지가 수계를 따라 분포하면서 그 영향으로 연초, 마늘, 호도, 양잠, 쌀 등이 재배되고 있으며, 지하자원으로는 흑연과 석탄이 생산되었으나 사양길이다.


5. 교육・문화

관기리 소재 관기초등학교가 있으며, 적암, 소여, 기대는 아동 부족으로 폐교되었다. 구병산자락에는 인공위성기지국이 설치되어 문명의 이기를 보고 있다.

갈전리(葛田里)

1. 위치

면적 2.9㎢, 인구 68가구 222명(1999년말)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변둔리(卞屯里), 서는 세중리(世中里), 남은 옥천군(沃川郡), 북은 소여리(所餘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의 지역으로서 칡밭이 많이 있으므로 치랏골 또는 갈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증산리(甑山里)를 병합하여 갈전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시루산(甑山)마을 : 갈전 북쪽 시루봉 밑에 있는 마을.
  • 윤당골 마을 : 치랏골 동쪽에 있는 마을.
  • 작은당골마을 : 큰당골 북쪽에 있는 마을.
  • 치랏골 : 갈전리를 말함.

4. 기타지명

  • 갈전소류지 : 치랏골에 있는 소류지.
  • 강대박골 : 갈전 2리에 있는 골짜기.
  • 등로골 : 갈전 2리에 있는 골짜기.
  • 삼두봉 : 치랏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셋임. 삼 형제봉이라고도 함.
  • 오무뜰 : 치랏골 서쪽에 있는 들.
  • 중매길 들 : 갈전 북쪽 세중리와 경계되는 들.
  • 치봉골 : 갈전 2리에 있는 골짜기.
  • 효자고개 : 갈전리 저수지에서 수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로효자 정재수가 아버지와 함께 갈전 고개를 넘어 큰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고 가는데 억수같이 눈발이 쏟아지는 추위 속에서 부자는 그 고개에서눈속에 파묻혀 죽고 말았는데 효자 정재수가 아버지를 품고 죽었다 하여 효자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정재수의 비석과 묘가 있음.

갈평리(葛坪里)

1. 위치

면적 4.71㎢, 인구 91가구 224명(1999년말) 본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적암리(적암리), 서는 수문리(水門里), 남은 송현리(松峴里), 북은 외속리면(外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의 마로면 지역으로서 칡이 많았던 벌판이었으므로 갈벌 또는 갈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대(新垈)를 병합하여 갈평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새터(新垈) : 갈평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
  • 안말 : 갈평 안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가래실 : 안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가 가래같이 생겼다고 함.
  • 갈평소류지 : 증산골 남쪽에 있는 소류지
  • 개동이산 : 안말 서쪽에 있는 산으로 등잔걸이처럼 생겼음.
  • 구렁이 들 : 진동 서쪽의 들로 물 많고 토질이 좋다고 함.
  • 기차바우 : 구병산 아래에 있는 바위가 기차모양을 함.
  • 다락논골 : 안말 서쪽에 있는 들로 다락논이 많은 골짜기.
  • 달밤들 : 새터 동쪽 들로 달밤에도 가뭄이 든다고 함.
  • 도롱골 : 도마티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도마티 : 갈평에서 적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도마같이 생겼음.
  • 바른골: 안말에서 구병산을 향하여 오른쪽에 있는 큰 골짜기.
  • 배너미고개(문바위) : 바른골에서 내속리면 삼가저수지로 넘어가는 고개. 천지개벽 당시 배가넘어다녔다 하여 배너머고개라고 하고 바위가 문 같이 생겼다 하여 문바위 고개라고도 함.
  • 벼까리봉산 : 구봉산의 일환으로 노적같이 생겼음.
  • 복호등 : 구봉산의 한 봉우리. 범이 업드린 모양을 함.
  • 시양골 : 전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절이 있어 시앙을 드리러 온 사람들이 머물렀다고 함.
  • 어딩이골 : 바른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컴컴하여 어둡다 함.
  • 오야골 : 안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오얏나무가 있었다 함.
  • 와우산(땅재) : 안말 동쪽에 있는 산으로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 하며, 김해 김씨 제당이 있음.
  • 절골 : 전에는 절이 있었다 함.
  • 증산골 : 안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시루 모양같이 생겼음.
  • 진바닥등 : 땅재 남쪽에 있는 들. 땅이 질다고 함.
  • 질기너머고개 : 새터에서 적암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소의 질마같다 하여 붙인 이름.
  • 큰골 : 개미덕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호랑이묘 : 안말 서북쪽에 있는 묘. 전에 김해김씨의 묘터를 잡아주었다는 호랑이를 이곳에 묻었다고 함.

5. 문화유적

  • 사모각(師慕閣)
    갈평리에 있는 비지정 문화재, 김해인 해사 김정배(海史 金鼎培)의 문하생들이 스승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81년에 건립하였음.
  • 영모재(永慕齋)
    갈평리에 있는 김해김씨 소유의 비지정 문화재 병산 김수기( 金守起)가 그의 아버지인 통정부군 이직(以直)을 장사지내고 3년동안 시묘하던 곳으로 그의 9대손인 정배(鼎培)가 그 조상의 효성을 사모하여 영원을 기리고자 친척들과 더불어 창건한 것이다.
  • 정수암지(晶水庵址)
    갈평리 13번지 터, 속칭 절골이 있는 절터. 창건 연대를 알 수 없고 절터가 3개소나 있는데 큰절, 중간절, 안절이라 불렀다는데 흔적만 남아 있다. 절터의 면적은 큰절이 300㎡, 중간절터가 150㎡, 안절터100㎡, 사찰 주위를 석출으로 둘러 약 30m 정도이고, 높이가 1.5m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 사찰에 빈대가 생기자 주지가 “불도를 닦는 우리가 생명이 있는 빈대를 어찌 죽일수 있는가?” 하고 그 곳을 떠나자 다른 승려들마저 모두 떠나 폐찰되었다고 전해 옴.

관기리(官基里)

1. 위치

면적 2.3㎢, 인구 377가구, 1,148명(1999년말),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송현리(松峴里), 서는 탄부면(炭釜面), 남은 기대리, 북은 수문리(水門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왕래면의 지역으로서, 왕래원(王來院)이 있었으므로 관터 또는 관기(館基)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여리와 탄부면 구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관기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골안마을 : 관기초등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관기 1리에 해당됨. 큰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골안이라 부름.
  • 동녁 : 관기 동쪽에 있는 마을.
  • 섯녁 : 관기리 중심에 있는 마을.
  • 아랫사여(下士余) : 사여리 마을중 아래에 있는 마을.
  • 웃사여 : 관기 동남쪽에 있는 마을. 사여리 마을중 위에 있음.

4. 기타지명

  • 강칭이골 : 관기 동쪽 끝에 있는 골짜기로 산 지형이 칭이(키)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생김.
  • 고봉산(孤峰山) : 고봉들 가운데 외따로 있는 산. 옛날 천지개벽 당시 시루봉에서 상봉이 떠내려와 외롭게 정착되었다고 해서 고봉(孤峰)이라고 함.
  • 관터들 : 관기리 남쪽에 있는 들녘
  • 구렁고개 : 관기에서 돌쇠로 넘어가는 고개. 임진란 때 이여송(李如松)이 산세로 봐 큰 인물이 나올 것 같다 하여 산혈을 끊었다고 함.
  • 굴바우 : 사여리 남쪽에 있는 바위로 굴이 뚫려 있음.
  • 늑대골 : 사여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늑대가 많이 살았다 함.
  • 단지밭골 : 사여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단지를 묻고 그곳에 식량을 감추었다고 함.
  • 둑재 : 웃사여 남쪽 뒷산 제방둑이 생겼다 하여 둑재산.
  • 범정골 : 북골과 은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범같다 하여 범정골.
  • 북골 : 웃사여 동쪽의 골짜기로 오목하고 아늑하여 북골.
  • 비손바우 : 사여리 서쪽 300m 지점에 있는 바위로 정월 보름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원을 빌었다 함.
  • 성밑(성뫼) : 사여리에서 서쪽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옛 성터가 있음.
  • 옥관머리(모롱이) : 전에는 옥터가 있었다고 함.
  • 은골 : 둑재 동쪽에 뻗어있는 골짜기로 은이 났었다고 함.
  • 응골 : 사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응달진 골이라 함.
  • 잣바퉁이골 : 웃사여와 아랫사여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잣나무가 많았음.
  • 재경골 : 지형이 작약꽃이 핀 모형이라서 작약골이라고도 함.
  • 질기고개 : 사여들에서 소여리 은골로 가는 고개가 길다고 하여 질기고개라고 함.

5. 문화유적

  • 고봉정사(孤峰精舍)
    관기리 458-1 고봉 밑에 있는 고적으로 삼현정(三賢亭)이라고도 함. 조서 중기에 충암 김정(金淨)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삼파연류봉을 고봉이라 하고, 원정 최수성(崔壽城)이 고봉정을 건립하고 1519년 중종 4년 기묘사화 후 이곳으로 은거한 병암 구수복(具壽福)이 이어 받았다. 후에 정자가 퇴락하여 구수복의 5대손 일봉 이천이 봉 아래로 옮겨 지을 때, 지금의 건물로 세워졌다. 최수성, 김정, 구수복 3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충북지방기념물 제 51호)
  • 관기산성
    보은에서 상주를 가다가 관기리에서 오른쪽 남쪽으로 꺽어 금계천을 따라 오리쯤 가게 되면, 보은에서 남동으로 흘러내려온 보청천과 합류하는 곧바로 동쪽 산에 있는 산성을 말함.
    이 산성은 상주행로와 청주행로를 막는 한편 금계천을 받은 보청천을 통해 옥천의 산계리 토성 굴산성(屈山城)과 통하게 된다. 성곽은 458.5m이고, 성안에는 신라의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과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 신라가 쌓은 산성임을 알 수 있다.
  • 구수복묘비
    조선 중종(李朝 中宗)때 기묘(己卯) 명현(名賢)의 한 분인 능성인 병암 구수복의 묘비, 조선 숙종(肅宗)때 세움.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 전주 이씨 열녀문(全州 李氏 烈女門)
    능성인 병암 구수복의 부인인 전주 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537년 중종 32년에 명정되어 세운 정문이다. 최초에는 마로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음.
  • 왕래원터(王來院址)
    관터에 있는 왕래원터. 고려 31대 공민와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에서 와서 있다가 상주를 거쳐 청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머물었다고 함.

기대리(箕大里)

1. 위치

면적 5.95㎢, 인구 95가구 262명(1999년말). 본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소여리(所餘里), 서는 탄부면(炭釜面), 남은 원정리(猿汀里), 세중리(世中里), 북은 관기리(官基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탄부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모양이 키와 같이 생겼다 하여 깃대 또는 기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대리라 하여 마로면에 편입되었고 마로면의 중앙이라서 면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3. 자연마을

  • 기대 : 마을 모양이 키와 같이 생겼음. 산수가 빼어나게좋아 선비들이 많이 은거하였고, 소나무 숲이 우거졌으며, 대추나무도 많아 대추골을 이뤘다고 함. “箕山明月 ?水淸風” 삼태기 같이 생긴 기이한 산에 밝은 달빛이 가득한데, 중국에서도 빼어난 영수에 맑은 바람이 가득한 청풍명월에 젖어 선비들이 각처에서 모이고 모여은거하던 곳이 바로 깃대였으며, 짓대라도고 함.

4. 기타지명

  • 가마소 : 덕고개 벼랑 밑에 있는 소. 보청천 옆으로 우뚝 솟은 벼랑 위로 소로 길이 있었는데, 옛날 어느 시부가 가마를 타고 이곳을 지나던 중 하인들이 이곳 경치에 매혹되어 가마를 벼랑위에 내려놓고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바위 중앙이 부풀어 오르고 뒤뚱거리더니 가마가 벼랑으로 굴러 보청천에 빠졌다고 함.
  • 까자골 : 여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한쪽 가에 있다 하여 ‘가자골’이라고도 함.
  • 강거리 : 안산과 매봉재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강 건너에 있음.
  • 구정벼루 : 구정부리 벼랑을 말함.
  • 구정부리 : 승주골 동쪽에 있는 벼랑. 옛날 스님이 묘자리를 구하는데 좋은 묘자리가 구암들에 가서보면, 보이지 않고 구정부리에서보면 보이는데 이곳에서 스님이 절을 아홉 번했다 하여 구정골 또는 구정부리라 하였다 함. 오늘날 사람들은 바위 밑으로 다니고 있음.
  • 국사리쟁이 : 독가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이 우렁이 같이 생겼다 하여 우렁이골이라고도 일컬음.
  • 다래박골 : 강거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다래가 많았음.
  • 독가마골 : 밀금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독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 함.
  • 매봉재 : 깃대 동쪽에 있는 산으로 천지개벽시 매가 앉을 정도로만 남고 모두가 물에 잠겼다고 함.
  • 모장놀이터 : 짓대 동쪽에 있는 놀이터로 선비들이 옛날에 정자위에서 놀았다고 전함.
  • 밀금(密金) : 짓대 동쪽 골짜기로 이곳에서 금을 캤었다고 전함.
  • 배나무골 : 다래박 동쪽 골로 배나무가 많았다고 함.
  • 삿각재 : 짓대 서쪽 산으로 천지개벽 때 삿갓만큼 남았다 함.
  • 삿갓고개 : 짓대에서 쇠골로 넘어가는 고개. 삿갓처럼 남았다 함.
  • 쇳골 : 일제 때 형광석이 있었다고 함.
  • 승주골 : 짓대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여우골 : 강거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공동묘지였으며, 여우가 시체를 파먹었다고 함.
  • 자방골재 : 짓대에서 세중리 중뜸으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장이 섰었다고 전하고 있음.
  • 절골 : 짓대와 쇳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절이 있었다.
  • 통살목 : 독가마골 남쪽에 있는 산. 옛날 이곳은 배를 매던 곳이었으며, 또한 고기 잡는 통살을 놓았다고 전함.
  • 활장터 : 앞산 밑에 있는 백사장으로 옛날에는 이곳에서 활을 쏘았다는 곳이다.

5. 문화유적

  • 이세정묘비(李世禎墓碑)
    조선 연산군 때 청도군수를 지낸 인천 이씨의 묘비이다. 비문은 예안인 이고선(李固善)이 지음.

변둔리(卞屯里)

1. 위치

면적 3.18㎢, 인구 33가구 99명(1999년말). 본면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은 한중리(閑中里), 서는 갈전리(葛田里), 남은 옥천군(沃川郡), 북은 소여리(所餘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마로면의 지역으로서, 멋두니 또는 변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세동을 병합하여 변둔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가는골(細洞) : 멋두니 남동쪽 가는 골 입구에 있는 마을.
  • 멋두니(卞屯) : 변둔리에서 중심되는 마을. 시루산 꼭지에 해당되는 지형이라고 함. 밀양 박씨가 경북 안동에서 피난을 와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함.
  • 큰말 : 변둔리에서 가장 큰 마을.
  • 주막거리 : 멋두니 앞 도로앞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 있었음.

4. 기타지명

  • 가는골 : 가는골 뒤에 있는 골짜기. 입구에 마을이 있음.
  • 국수동 골 : 뒷손 골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서 장수들이 국수를 끓여먹었다고 하여 국수동이라 하였음.
  • 논골 : 가는골 아래에 있는 골
  • 매끄니골 : 가는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맞은편에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는데 그 명당 자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매끄니라 부른다고 함.
  • 삼두봉 : 가는골 뒤에 있는 산봉우리가 셋으로 해서 삼두봉.
  • 시루산(甑山): 로면의 갈전, 세중, 변둔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해발 505m, 산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음. 백조상(百祖上)이 일손(一孫)밖에 살아 남을 수 없는 난리가 일어나는데 이 때 살아남기 위해서 십승지지의 하나인 속리산을 찾아가고 그 가운데 사증팔항(四甑八項)에 해당하는 곳에 피난처를 정하라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말을 믿고 마로면 갈전리 증산(甑山)에는 양씨(梁氏)들이 피난을 오고, 시루봉의 꼭지에 해당되는 변둔리에는 밀양 박씨가 피난을 와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함.
  • 약물내기 : 멋두니 앞에 있는 들.
  • 절골 : 가는골 안길에 들어간 골짜기. 옛날 절이 있었음.
  • 쪼롱내 : 변둔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 경북 상주시 화서면 봉화 등에서 발원하여 세증천과 합수가 됨.
  • 큰골 : 멋두니 뒤에 있는 골짜기. 골이 크고 깊음

세중리(世中里)

1. 위치

면적 3.96㎢, 인구 115가구 331명(1999년말), 본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갈전리(葛田里)서는 원정리(猿汀里), 남은 옥천군(沃川郡), 북은 기대리(箕大里)에 접하고 있음.


2. 연혁

본래 보은군 마로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때 역마(驛馬)를 먹이던 곳으로 역마, 또한 마루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內洞)을 병합하는 세중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새뜸말 : 북바위 서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
  • 안꼴(內洞) : 행라 동남쪽에 있는 마을
  • 안말 : 안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 행랑 남동쪽에 있음.
  • 역마촌 : 세중에 있는 조선시대 관리와 행인들의 숙식을 제공했던 보통원(보통원)이 있었음.
  • 중뜸 : 새뜸 동쪽에 있는 마을로 중앙에 위치함.
  • 행랑마을 : 안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행랑채 같이 생겼음.

4. 기타지명

  • 가운데 방골재 : 방골재의 둘째 고개로 가운데에 위치함.
  • 개구리바우 : 세중리에 있는 바위로 개구리처럼 생겼음.
  • 끝 방골재 : 방골재의 끝에 있는 고개
  • 늑대바우 : 시루봉 정상에 있는 바위로 늑대처럼 생겼다고 함.
  • 대추말리 : 세중리에 있는 들로 4말리 중의 하나임.
  • 띠바골 : 세중리에 있는 골짜기.
  • 바래봉 : 세중리에 있는 산봉우리.
  • 방골재 : 세중리에서 관기 장터로 가는 고개로 고개 모양이 방처럼 생겼다고 함.
  • 불당골 : 북바위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불당이 있었음.
  • 삼박골 : 안골 남서쪽 골짜기로 옛날에 삼을 많이 심었음.
  • 세중저수지 : 세중리에 있는 저수지
  • 소때말리 : 4말리 중의 하나로 세중에 있는 들.
  • 신나무들 : 안골 서쪽에 있는 들로 신나물이 많이 남.
  • 입벌린바우 : 세중에 있는 바위로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음.
  • 장터 : 세중에 역(驛)이 있을 때 이곳에 장이 섰다고 함.
  • 중뜸골안못 : 중뜸 북쪽에 있는 못
  • 추자말리들 : 세중 4말리 중의 하나로 추자가 많이 생산됨.
  • 치봉골 : 세중리에 있는 골짜기.
  • 풍매기들 : 바람이 심하게 부는 들로 마루 동쪽에 있는 들녘
  • 행기들(黃雞): 마루 서쪽에 있는들로 옥답임.

5. 문화유적

  • 제경욱신도비(諸景彧神道碑)
    조선 순조(純祖)때 의사 칠원인 제경욱의 신도비로서 비문은 영의정 겸 춘추관관상감사 심상규(沈象奎)가 지었다.

소여리(所餘里)

1. 위치

면적 10㎢, 인구 100가구 329명(1999년말) 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 서는 기대리(箕大里), 남은 변둔(卞屯), 한중리(閑中里), 북은 임곡리(壬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는 보은군 탄부면의 지역으로서 소여, 또는 소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소리와 중소리, 하소리를 병합하여 소여리라 해서 마로면에 편입시켰다.


3. 자연마을

  • 가새뜸(중소여) : 소여 북동쪽에 있는 마을.
  • 꽃밭날 마을 : 꽃밭날 북쪽에 있는 마을.
  • 사기정골 마을 : 옛날에는 사기점이 있었다고 함.
  • 안뜸(하소여, 새터) : 위터 서북쪽에 마을 소여학교 북쪽 50m 지점 배너머 아래에 있는 마을.
  • 작은쇄 : 큰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 경주 김씨 조상들의 묘가 한곳에 자리잡고 있음.
  • 중소여 : 가새뜸 마을.
  • 큰말(양지말, 양지촌) : 위터 서북쪽 양지에 있는 마을.
  • 하소여 : 안뜸 마을.

4. 기타지명

  • 개미밑날 산 : 큰말 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허리가 개미허리 같다 하여 생긴 이름.
  • 국시바위 : 시루산 상봉에 있는 바위. 김옥균이 집안의 묘를 써놓은 바위로 권세를 상징한다 하여 붙은 이름.
  • 굴봉재 : 느름티에서 상주시 화남면 중늘리 재지골로 가는 고개로 굴곡이 많음.
  • 기별산 : 큰말 서쪽에 있는 산으로 지형이 게 같이 생겼음.
  • 꽃밭날산 : 봄이며 진달래가 많이 핀다고 하여 붙임.
  • 느름티들 : 사기점골 북쪽에 있는 들로 느림이 많았음.
  • 도룡골 :큰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는 골짜기.
  • 된비알산 : 소여 2리에 있는 산으로 비탈이 많아 가파르다고 함.
  • 동구나무골 : 예전에 큰 동구나무가 있어 붙은 골짜기임.
  • 뒷골 : 안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정성골 펀던에 있음.
  • 말랑들 : 가새뜸 남쪽에 있는 들이 상단에 위치하여 붙여짐.
  • 맷돌바우 : 소여 2리에 있는 바위로 맷돌처럼 생겼음.
  • 배너머고개 : 조상골에서 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임실재 동쪽이 됨. 돌배나무골 너머에 있는 고개 옛날 홍수 때 배가 이 고개를 넘어 왔다고 함.
  • 버꾸골 : 소여 2리에 있는 골짜기로 뻐꾸기가 많이 운다고 함.
  • 범바우 : 바위 모양이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함.
  • 부엉산 : 소여 2리 산으로 부엉이가 많이 운다고 함.
  • 북바우 : 큰말 동쪽에 있는 바위로 북같이 생겼으며, 바람이 부는 날에는 북소리가 난다고 함.
  • 서당재 : 큰말에서 임곡리 서당으로 넘어가는 고개.
  • 섯밭날 산 : 큰말 동쪽에 있는 산으로 지형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붙여진 이름.
  • 시루산 : 위터 남쪽 산 모형이 시루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함.
  • 양산골 : 큰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산 같이 생겼음.
  • 왕래재(旺來峴): 말에서 송현리 웃솔고개로 넘어가는 고개. 홍건적의 침입시 공민왕이 경북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함.
  • 용소솜골 : 소여 2리 골짜기에 용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고 함.
  • 임실재 : 조상골에서 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잣자골 : 큰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작은 계곡이 많이 붙여진 이름.
  • 잠성골 펀던 : 안골 동쪽 400m 쯤 뒷골에 있는 버덩. 평평하 바위가 넓게 자리잡고 있음.
  • 절골 : 소여 동남쪽에 있는 저수지. 주변의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함.
  • 줄바우 : 작은 소여에 있는 바위로 죽 이어져 있음.
  • 차돌배기재 : 위터에서 상주시 화남면 중눌리먹뱅이로 넘어가는 고개에 차돌이 많음.
  • 참샘 : 큰말 앞에 있는 찬 샘을 말함.
  • 횟골 : 예전에 백회를 구었다고 함.

5. 전설

  • 공민왕의 전설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두 번째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은 그해 11월 18일 서울인 개경을 버리고 경상도 복주(福州)오늘의 안동으로 피난을하게되었다.정세운, 이방실 등의 분전으로 홍건적을 괴멸시키고 개경을 도로 찾았으나, 김용이란 자가 정세운의 전공을 시기하여 정세운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왕은 안동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길에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에서 약 3개월간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마로면 소여리 큰말에서 송현리웃솔고개로 넘어가는 산고개를 왕래현(旺來峴)이라 부르는데 공민왕이 상주에서이 고개를 넘어 관기에 오셨다는 것이다. 왕은 이 곳에서곡식 창고도 짓고 성도 쌓게 하였으며, 감옥도 만들도록 하였다.
    오늘날 ‘원앙골’이 사창이 있었던 곳이며, ‘옥갈머리’는 바로 옥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마로면 소재지인 관기(官基)라 하는 것은 관기(館基)라하던 것이변한 것이라 한다. 공민왕은 관기를 떠나 청주로 가던 중 삼승면 원남에서 비를 만나 여기에서 하루를 머물고 갔다. 그때 왕을 따르던 염제신, 이암 등 일곱 워로대신들이 모여 앉아 웃고 이야기하며 시를 짓고 놀 때, 대장군 김하적은 피리를 불고 김사혁 장군은 피바를 타고 대신 황석기가 부르는 시에 화답시를 지으면서 흥겨워 했다는 것이다. 황석기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하면
    “푸른 옥잔은 깊고 술맛은 아름답구나. 거문고 소리는 느린데, 피리소리 길다. 그중에 가느다란 노래소리 들리니 일곱 늙은이 서로 즐기는데 수염은 서리같네.”

송현리(松峴里)

1. 위치

면적 1.99㎢, 인구 59가구 190명(1999년말),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임곡리(壬谷里), 서는 관기리(官基里), 남은 소여리(所餘里) 북은 갈평리(葛坪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왕래면(旺來面)의 지역으로서 솔고개 밑이 되므로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수영리(水永里)를 병합하여 송현리라 해서 마로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샘뜸마을 : 솔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 이 마을에서는 샘 하나를 가지고 사용했다고 함.
  • 송골마을 : 솔고개 북서쪽에 있는 마을.
  • 송현 : 옛날 큰소나무가 고개의 마을 밑에 있어 솔고개 또한 송현이라고도 불리움.
  • 수영골 : 골고개 동남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뒷골짜기에 옻샘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여와서 목욕을 했다고 함.
  • 아랫말 : 수영골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서당이 있었다고 함.
  • 왕래재 마을 : 왕래재 밑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골안들 : 수영골 동북쪽에 있는 들. 양쪽에 골이 졌음.
  • 귀골 : 아랫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가 귀 같이 생겼다고 함.
  • 노기재 : 수영골에서 갈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놀다간 곳이라고 함.
  • 대쟁이 뒤골 : 수영골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는 대장쟁이가 살았다고 함.
  • 두독들 : 아랫말 북쪽에 있는 들. 두독같이 언덕진 들이라고 함.
  • 동구나무밑못 : 아랫말 동쪽 못으로 동구나무 밑에 있음.
  • 밀개등 : 장구봉 동쪽 산으로 밀개처럼 생겼다고 함.
  • 바래봉 : 귀골 동쪽 산으로 지형이 누구를 기다리는 형상임
  • 봄버리 밭골 : 왕래재 동쪼 골짜기로 봄보리가 잘 되었다 함.
  • 삼각지 못 : 웃솔고개 남쪽 못으로 세모처럼 생겼음.
  • 설매들 : 웃솔고개 남쪽 들로서 기름진 옥토라고 함.
  • 솔개봇들 : 웃솔고개 앞에 있는 들.
  • 여수발짜기 : 옥녀봉 동쪽 산으로 여우 굴이 있음.
  • 옥녀봉 : 웃솔고개 북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임.
  • 왕래재 고개(旺來峴): 웃솔고개에서 소여리 큰말로가는 고개. 공민왕이 넘어온 고개라함
  • 장구봉산 : 바래봉 동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장구처럼 생김.
  • 장판골 : 천득이 뒷골 옆에 있는 골짜기에 전에는 장이 섰다고 함.
  • 천득이뒷골 : 황새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서 천득이 어머니가 목매달아 죽었다고 함.
  • 황새봉 : 수영골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산 모양이 황새의 주둥이처럼 생겼다고 함.
  • 희비자골 : 왕래재 동쪽에 있는 골짜기. 후미지고 사람의 왕래가 없어 붙여진 이름임.

수문리(水門里)

1. 위치

면적 4.34㎢, 인구 103가구 280명(1999년말). 본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갈평리(葛坪里), 서는 탄부면(炭釜面), 남은 관기리(官基里), 북은 외속리면(外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왕래면의 지역으로서 수문이 있었으므로 수문(水門)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방하리 외속리면 불목리 일부와 탄부면 구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문리라 해서 마로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건너말 : 방아실 남쪽에 있는 마을. 방아실 건너쪽에 있음.
  • 돌쇠마을 : 수문 서북쪽에 있는 마을. 수문리 원앙골에서 흐르는물이 팡산 정자나무 밑에서청룡암을 휘돌아 흘러 소용돌이가 생기기 때문에 ‘돌소’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돌쇠마을이 됨.
  • 등넘마을 : 음지뜸 남쪽 등 너머에 있는 마을.
  • 방하실(芳花室): 돌쇠 동북쪽에 있는 마을. 양쪽 산이 방아다리처럼 뻗어 내려왔다고 함.
  • 수문말 : 옛날 마을 느티나무 밑에 돌문으로 된 수문이 있어 수문리라 부름.
  • 한실말 : 웃말 동쪽에 있는 마을.

4. 기타지명

  • 감자고개 : 구렁고개에서 방아실로 넘어가는 고개.
  • 구렁고개 : 돌쇠에서 관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골짜기가 깊어 붙여진 이름임.
  • 능안골 : 묘터가 좋아 왕릉터로 충분하다 하여 능안이라 칭함.
  • 도마티 : 방하실에서 갈평리 안말로 넘어가는 고개로 원앙이란 승려가 지어 놓은 이름이라 하며, 열 두 도마티가 있었다고 함.
  • 박골 : 제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박 같이 생겼다고 함.
  • 보청천 제방 : 삼가천 제방이라고 하며 삼가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은 제방임
  • 뻔들지방 바우 : 산지당골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 경사져서 바위가 매우 미끄럽다고 함.
  • 사창골 : 전에 사창이 있어 군량미를 임시로 보관했다 함.
  • 수구렁들 : 방화실 북쪽에 있는 들. 옛날 수가 많아 수구렁
  • 안골 : 방아실 안쪽에 있는 골짜기. 산이 임금 王자형으로 생겨 ‘왕골’이라 칭하다가 안골이 됨.
  • 업드렁 바우 : 한실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 업드려 있는 것처럼 생겼으며, 10여명이라도 이곳에서 비를 피할 수 있다 함.
  • 엉고개(옹고개) : 방아실에서 외속리면 불목리 수구렁으로 넘어가는 고개.
  • 재경골 : 골짜기가 작약말발지형(芍藥末發地形)이라고 함.
  • 재골 : 수구렁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고령 박씨가 이곳에서 기와를 만들었다고 함.
  • 절골 : 옛날 절이 있었으며, 원앙이라는 스님이 살았다고 함.
  • 탑거리 : 조선 초 영남 지방 과객들이 이곳을 지나가다 쉬면서 돌을 던져 쌓은 돌무더기 탑이 있음.
  • 함박수(웅덩이) : 수문리에 있는 웅덩이로 함박꽃처럼 생긴 소로 명주실이 한 꾸러미가 전부 풀려 들어가는 깊은 소임.
  • 함박수 들 : 함박수 웅덩이가 있는 들.
  • 희비자골 : 외따로 떨어져 있는 후미진 곳에 있다 하여 희비자 골짜기라고 함.

5. 문화유적

  • 유언억 묘비(兪彦億 墓碑)
    조선조 숙종(숙종)때 학자였던 기계인 유언억의 묘비. 비문은 승정대부 송근수(송근수)가 짓고 통정대부 송응수(송응수)가 썼음.

오천리(梧川里)

1. 위치

면적 6.14㎢, 인구 66가구 179명(1999년말).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기대(箕大), 원정리(猿汀里), 서는 삼승면(三升面)남은 옥천군(沃川郡), 북은 탄부면(炭釜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마로면의 지역으로서, 작은 내가 있으므로 오그내 또는 오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동(金洞)을 병합하여 오천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금동(金洞) : 오그내 동쪽에 있는 마을로 쇠가 많이 났었다고 함.
  • 동배너머 마을 : 붓골 남쪽에 있는 마을.
  • 붓골 : 붓골에 있는 마을 뒷동골에서 2백미터 지점에 있음.
  • 절골말 : 절골에 있는 마을. 뒷동골에서 서쪽으로 1km 지점에 있음.
  • 중뜸 : 절골 남쪽 중간에 있는 마을.
  • 필동(筆洞) : 붓골 마을을 말함.

4. 기타지명

  • 굴골 : 청산면 만월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석회함 굴이 청산까지 연하여 매장되었다고 함.
  • 긴재 : 셋짐매에서 삼승면 천남리 각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2km나 되어 길다고 함.
  • 대왕산 : 오천리 앞산으로 옛날 이곳에서 대왕이 났다고 함.
  • 뒷동골 : 붓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 뒤에 있음.
  • 마로 형석광산 : 오그내에 형석광산이 있었음.
  • 만부봉산 : 대왕산 밑에 있으며, 태자가 대왕의 만수무강을 이곳에서 빌었다고 함.
  • 붓당골 : 뒷동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붓대롱처럼 좁음.
  • 비조티(飛鳥峙) : 금동에서 탄부면 대양 수피로 넘어가는 고개로 산맥이 새가 나는 것처럼 생겼다고 함.
  • 솔방골 : 오천리에 있는 골짜기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함.
  • 직골 : 태자봉과 긴재 사이에 있는 골짜기.
  • 행상바위 : 붓골 동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상여처럼 생겼음.
  • 형석광산 : 붓골 동북쪽의 형석광산이었으나 1959년부터 채광하였으나 지금은 폐광 되었음.
  • 흠샘 : 오천 2리의 샘으로 흠처럼 생겼음.
  • 황새바위 : 오천 2리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이곳에 황새들이 살았다고 함.

5. 문화유적

  • 안응구 묘비(安應龜 墓碑)
    조선 현종(顯宗)때, 은사인 광주인 안응구의 묘비, 비문은 승록대부겸 예문관제학 오천 정호가 짓고, 조봉대부 은진 송달수(宋達洙)가 썼다.

원정리(猿汀里)

1. 위치

면적 3.64㎢, 인구 79가구 229명(1999년말), 본면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은 세중리(世中里), 서는 오천리(梧川里), 남은 옥천군(沃川郡), 북은 기대리(箕大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마로면의 지역으로서,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城)이 살았으므로 원정 또는 원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모동(牟洞), 점동(店洞), 월남리(月南里)를 병합하여 원정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모동(보리골, 관리동, 본리골) : 원정 동남쪽에 있는 마을. 우암 송시열이 관리동으로 이름 지었는데, 그 후 현감의 전령문서에 관리동을 속칭한 보리골로 착각하여 모동이라 썼던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함.
  • 점동 : 사모바우 동쪽에 있는 마을에 토기점이 있었다고 함.

4. 기타지명

  • 가지골 : 원정에 딸린 골짜기.
  • 가지골돌다리 : 가지골 앞에 있는 돌다리. 원정 최수성이 음양을 맞추어 놓아서 아무리 심한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는다고 함.
  • 너소 : 보청천에 있는 소. 늘 깊은 물이 고여 있다고 함.
  • 바리봉산 : 점동 남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347m 점동에서 마주 보이는 산봉우리라 하여 바리봉이라고 함.
  • 바른골 : 원정 2리에 있는 골이 바르다고 함.
  • 바우배기산 : 원정 2리에 있는 산으로 바위가 많다고 함.
  • 분무골 : 원정 2리 골짜기로 옛날 대장간이 있었다고 함.
  • 사모바우(帽岩) : 모동 서북쪽에 있는 바위가 사모처럼 생겼다 함.
  • 삼밭골 : 원정 2리 골짜기에 삼밭이 많았는데 수확이 많았음.
  • 상운암(祥雲岩) : 장군봉에 있는 바위로 구름 이름을 딴 것임.
  • 장군봉 : 모동 북쪽 산에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이 있다고 함.
  • 최원정 탑 : 탑싸니에 있는 오층석탑으로 최원정이 세웠다고 함.
  • 큰골 : 원정 2리에 있는 골짜기로 골이 크다고 함.
  • 탑싼이 :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오층석탑을 탑싼이라고 함.
  • 황개들 : 보청천과 세중천의 합수지점에 있는 들로 침수가 잘 되며,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고 함.
  • 흑연광산 : 모동 서남쪽에 있는 광산으로 1917년부터 4년간 일본 사람이 경영하다가 한일 광업주식회사가 불하를 받아 1958년부터 흑연을 캐다가 오늘날 폐광 상태임

5. 문화유적

  • 원정리 사지
    원정리 1리 마을에서 흑연광이 있는 곳으로 1km, 이곳에서 600m 쯤 산정을 향해 올라간 위치에 절터가 있다. 대지 500평에 건평 30평정도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임야가 되고, 남쪽 산으로 올라가면 탑산석탑이 있다.
  • 강교(矼橋)
    원정리는 원정 최수성이 은거하며 살았다는 곳이라 해서 원정이라 불리웠다. 조선 중종(중종)때, 최수성이 이곳 점동에 은거하고 있던 중 주민들이 마을 앞 내를 건너는데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오천에서 세중으로 건너는 여울에 음양석을 택하여 놓았기 때문에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요동하지 않는다 함.
  • 원정리 3층 석탑
    원정리 탑산리에 있는 높이 3.68m의 3층 석탑. 충청북도 유헝문화재 제 118호로 지정되었다.
    초층, 2층, 3층의 탑신석은 모두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각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소문이고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급격하여 중후한 느낌은 없다. 전체의 형태나 그 조성 수법으로 보아 신라형을 따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1982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일제시대 광산을 운영하던 일본사람이 탑에 유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광부들을 동원하여 탑의 윗층을파손하고 도굴해간 뒤 마을이 불안하였는데 다시 광부와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탑을 복원한 뒤 마을이 무사하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6. 전설

  • 보리 1천 석의 부자가 알거지가 됨.
    옛날 보리 1천석을 하는 부자가 있었는데 어찌나 인심이 사나웠던지 이웃간에 왕래조차 없었다. 하루는 스님이 나타나 시주를 요구하니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스님을 내쫓았다. 스님이 돌아서며 부락 입구에 있는 정자나무와 돌을 없애면 쌀 1천석은 할수 있을거라고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은 부자가 즉시 나무를 베고 돌을 치워버렸더니 몇 해 안가서 부자는 알거지가 되어 마을을 떠나게 되고 마을에는 재앙이 끊이질 않았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심고 돌탑을 쌓았더니 재앙이 끝이 나고풍년이 들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임곡리(壬谷里)

1. 위치

면적 3.8㎢, 인구 27가구 68명(1999년말). 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慶北), 서는 송현리(松峴里), 남은 소여리(所餘里), 북은 적암리(赤岩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왕래면(旺來面)의 지역으로서 임실 또는 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임곡리라 해서 마로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서당골 : 임곡 서쪽 마을에 서당이 있었다고 함.
  • 소토골 : 임곡리에 있는 마을.
  • 우복동 : 임실의 옛날 이름으로 마을의 형상이 누워 있는 소의뱃속 같다 하여 붙은 이름.
  • 웃서당골 : 임곡 서쪽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서당이 있었음.
  • 임곡(壬谷) : 충북과 경북의 도계에 있는 마을로 자연부락은 하나이면서 행정부락은 둘로 나눠져 보은군 마로면 임곡리와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로 불리고 있다.

4. 기타지명

  • 두투바우 : 여수바위 서쪽에 있으며, 형이 거북같이 생겨 임곡리를 보호하는 바위라고 함.
  • 마당바우 : 두투바우 서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 이곳에서 장수가 말을 타고 소변을 보았다고 하여 마당처럼 평평하다고 함.
  • 말목재 : 임곡에서 적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산 모양이 말의 목처럼 생겼다고 함.
  • 민핀골 : 문바위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봉우재 : 임곡리 산으로 옛날 봉화대가 있었다고 함.
  • 북바우 : 임실 서남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북처럼 생겼음.
  • 빈지바우 : 임실 서쪽 산으로 반지 같이 생긴 바위가 생겼음.
  • 여수바위 : 임실 서쪽에 있는 바위로 여우같이 생겼음.
  • 용굴 : 말고개에 있는 굴로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고 함.
  • 질마재고개 : 임곡리 골짜기로 길마처럼 생겼음.

적암리(赤岩里)

1. 위치

면적 6.8㎢, 인구 87가구 232명(1999년말). 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 서는 갈평리(葛坪里), 남은 임곡리(壬谷里), 북은 내속리면(內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왕래면의 지역으로서 적바위가 있으므로 적바위 또는 적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적암리라 해서 마로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사기막말 : 상주시계에 위치한 마을. 조선 선조때 이명백이란 장군이 임란중 스승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킬 때 스승의 만류로 참전치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병을 간호하던 중 금산에서 의병들이 패하여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령, 중모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워 전과를 거두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한 순국을 하였다. 여기에서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인 곳이라 하여 ‘사기막’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또한 사기를 굽던 곳이라고도
  • 안말 : 사기막 마을을 말함.
  • 주막뜸 : 사기막 남쪽에 있는 마을. 주막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적암휴게소가 자리하고 있다.

4. 기타지명

  • 남산모롱이 : 베루들 북쪽에 있는 모롱이.
  • 넓은골 : 적암리에 있는 넓은 골짜기.
  • 도마티들 : 적암 서북쪽에 있는 들. 옛날에는 집이 있고 사람이 살던 곳으로 도적이 심해 집이 없어지고 들로 변함.
  • 먹골 : 먹산 동쪽 골짜기.
  • 먹뫼들 : 먹산 북쪽에 있는 들.
  • 먹산 : 적암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비란이라는 새가 먹을 먹으러 온다는 산.
  • 바구시샘 : 시루봉 밑에 있는 샘으로 장수가 시루봉에서 수련하던 중 말의 먹이를 주던 곳이라 함. 샘의 길이가 4m 깊이가 20m나 된다고 함.
  • 베루들 : 적암 서쪽에 있는 들로 벼루 모양이라고 함.
  • 보은바위 : 적바위를 말함.
  • 북바위골 : 적음터에 있는 바위로 북 같이 생겼음.
  • 붉은디기 버딩 : 적암 북쪽에 있는 버딩으로 흙이 붉음.
  • 비양골 : 스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새목이고개 : 적암에서 상주시 화남면 평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모양이 새의 목처럼 생겼다고 함.
  • 세창고개 : 적암에서 붉은디기로 넘어가는 고개로 쉬어가는 고개라 새참고개라 하던 것이 ‘세창고개’로 변한 것임.
  • 속곳바우 : 적암리와 상주시의 군계에 있는 바위로 치마바위라고도 불리움.
  • 스무골 : 적암 북쪽 골로 작은 골짜기가 많음.
  • 시루봉(증봉) : 적암에 있는 높이 320m의 산으로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함. 보은(報恩)의 4증 8항 동쪽에 있다 하여 동증이라고 함.
  • 신선대 : 스므골 위쪽에 있는 기우제 터 예전에 신선이 내려왔다고 함.
  • 쌀바우 : 적암리 시루봉 중턱에 있는 바위.
  • 원골(원터) : 조선시대 관리와 행인들의 숙식을 제공해 주던 역원이 있던 터.
  • 임신바우 : 사기막 마을에 있는 바위.
  • 장기판들 : 신선이 장기를 두는 형국이라고 함.
  • 적바위(보은바위) : 구병산 동쪽에 있는 바위로 색깔이 붉어 적바위라고도 하며, 충북과 경북의 도계에 바위가 두 개 있는데, 보은쪽에 있다고 하여 보은바위라고 함.
  • 전진바우 : 적암 남쪽에 있는 바위에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 새겨짐
  • 해상골 : 스무골 동쪽골로 바다같이 골짜기가 깊다고 함.
  • 횟골 : 옛날 이곳에서 회를 구었다고 함.

5. 문화유적

  • 적암리 청자요지(靑磁窯址)
    유구가 두 곳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적암리 서쪽,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는 글씨가 있는 전진바위 북쪽 40미터 정도의 구릉에 있는 무너진 요지인데 가마의 윤곽이 경사가 져 있으며, 주변에 그릇을 굽기 위한 갓바퀴와 눈바기 자국이 있는 순청자에서백자조각까지 흩어져 있어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876미터의 구병산 자라에 위치하며, 앞에는 금계천이 흐르고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요지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일찍이 요지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6. 전설

  • 보은현감(報恩縣監) 장현광의 선정(善政)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 상주군과의 도계에 ‘솟곳바위’ 또는 ‘치마바위’라고부르는 큰 바위가 있고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데 대하여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회)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장현광 선생은 서기 1554년에 태어나 서기 1637년에 세상을 떠난 분으로 자를 덕회(德晦), 호가 여헌(旅軒)이라고 부르는 이로 인동 장씨다. 그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제자이자 조카사위로 퇴계의 성리학을 전수 받았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서기 1595년에 학문이 높고 행실이 바른 분으로 추천되어 보은현감(報恩顯監 - 오늘의 군수)에 임명되어 21일간 근무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형조좌랑(刑曹佐郞 - 법무부 계장급)에서부터 공조판서(工曹判書 - 건설부장관)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나 벼슬자리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속곳 바위의 이야기는 그가 보은현감에 있다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갈 때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록 한달 가량 재직하였지만 학문과 덕이 높은지라 고을을 다스림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또한 고을 백성들도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던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소문이 나자 고을 사람들은 너나 없이 좀더 계셔서 고을을 다스려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선생의 뜻을 꺽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이별을 아쉬워 하면서 전별의 선물을 가져왔다. 그러나 워낙 청빈한 현감인지라 모두 물리치고 부임할때와 마찬가지로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 인동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행차는 어느덧 군의 마지막 적암리에 도착하고 한말만 더 가면 이제 충청도를 지나 경상도 땅인 상주였다. 선생은 걸음을 멈추게 명하고 길가 나무그늘에 앉아 보은 고을 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가슴에 만감이 오고갔을 것이다. 선생의 눈길이 멈춘 것은 가난한 자신과 결혼한 이후 고생만 하는 아내의 무릎 밑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놀라움에 크게 떠졌다. 아내 치마 밑으로 삐죽이 나온 아내의 속곳이 처음 보는 황홀한 비단옷이었다.
    “여보 부인 내가 가난하여 당신에게 옷 한 벌 못해 주었구려. 참으로 미안한 일이나 이제 부인의 속곳을 보니 처음 보는 비단이구려. 어디서 장만한 옷입니까?”하고 선생이 묻자 부인은 자랑이나 하듯 치마를 조금 더 걷어 올리며 “이 옷 말씀입니까? 우리 형편에 이와 같은 비단옷을 구할 수 있습니까? 어제 저녁에 당신께서 고향에 돌아가신다고 고을 백성이 섭섭하다고 저에게 선물로 가져온 것인데 처음 보는 비단옷이라 입고 가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한참 후에 “부인 우리는 참으로 가난하구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이 자랑이 되지는 못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때문에 나는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삼가고 청빈을 낙으로 삼아 살아왔소 그런데 비록 속곳 치마지만 남에게 폐를 주고 선물로 받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구려”하면서 다시 눈을 하늘 쪽으로 돌리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여보 제가 부덕이 부족하여 당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런 몹쓸 여자가 있습니까? 아직 보은 땅이니 저 앞에 보이는 바위 위에 두고 가면 보은에서 받은 물건을 보은에 돌려주는 것이 될 것인즉 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속곳을 벗어 바위 위에 걸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향을 떠났다 한다. 참으로 그 남편에 그 아내의 행실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부터 그 바위를 “속곳바위” 혹은 “치마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맑고 조촐한 덕행을 잊을 수 없었던 고을 백성들이 비를 세워 영원히 기리었고, 이 비는 현재 400여년이 지났지만 보은읍 죽전 2리 보은고등학교 정문 옆 길가에 우뚝 솟아있어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 쌀이 나오는 구멍바위(쌀바위)
    320미터의 시루봉 산 중턱의 절벽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는데 “쌀바위”라 부른다. 신라 때 이 바위 앞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스님 한 분이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너무나도 작은 암자여서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도 없어서 암자 뒤 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겨우 먹고 지내었다. 암자에 찾아오는 사람 수만큼 쌀이 나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바위 밑에는 쌀이 무진장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쌀이 나오는 구멍이 작아서적게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구멍을 크게 파놓았다 이제는 한꺼번에 쌀이 많이 나올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튿 날 아침에 큰 바가지를 가져가 바위 구멍에 대었다. 이게 웬 일입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쌀 한 톨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중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린 탓으로 쌀이 나오지 않자 자연히 암자도 없어지고 이 바위만 남았다고 한다.

한중리(閑中里)

1. 위치

면적 3.45㎢, 인구 42가구 122명(1999년말).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경북(慶北), 서는 변둔리(卞屯里), 남은 옥천군(沃川郡), 북은 소여리(所餘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마로면의 지역으로서 대한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백록동(白鹿洞)을 병합하여 한중리라 하였다.


3. 자연마을

  • 말꼴 : 힐녹이 아래쪽에 있는 마을. 장수가 나서 어릴 때 죽었는데 말이 한 필 나와 죽음으로서 장수와 같이 묻었다 함.
  • 백록동 : 힐녹이 마을
  • 양짓말 : 힐녹이 양지쪽에 딸린 마을.
  • 피난민촌 : 힐녹이에 딸린 마을. 6.25때 피난민들이 살았음.
  • 힐녹이(白鹿洞) : 한중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흰 사슴처럼 흰 바위가 있음.

4. 기타지명

  • 가운데골 : 한중 1리에 있는 골짜기.
  • 굴봉산 : 한중 1리 뒤에 있는 산으로 해발 500미터로 한중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호랑이 굴이 많다고 함.
  • 두람무티 : 한중 1리 서쪽으로 50미터 지점으로 경북과 접경에 있는 약물탕으로 눈병에는 이약물이 특효라고 함.
  • 맹맥이 바우 : 굴봉산에서 해발 400미터 지점에 있는 바위.
  • 백토 : 세 번디골에 있으며, 쌀 대신 백토로 송편을 할 수 있다고 하나, 양이 적어서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함.
  • 벌떤산 : 한중1리 뒤에 있는 산으로 호랑이 바위가 있음.
  • 법후골 : 백록동 동남쪽 산에 있는 골짜기에 폭포수가 있는데, 겨울에 얼면 4월에 가서야 얼음이 녹는다고 함.
  • 북나무들 : 한중저수지 자리에 있던 들로 2만편정도였으며, 큰 북나무가 있었고, 현재 저수지로 수몰됨.
  • 석산봉 : 한중리 앞산으로 바위가 많다고 함.
  • 선바위 : 호랑이 바위라고도 함.
  • 숯가마골 : 옛날 숯을 구웠다는 골짜기.
  • 애장터 : 가운데 골에 있으며, 아기가죽으면 이곳에 갖다 버렸다고 함.
  • 오소리밭골 : 한중 2리 골짜기로 오소리가 많았다고 함.
  • 절골 : 백록동 동남간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 함.
  • 정자나무 : 한중 1리에서 북쪽으로 200미터 지점에 있는 나무로 노이 35미터 굵기가 네 아름이 된다고 함.
  • 제비바우 : 맹맥이 바위라고도 함.
  • 한중저수지 : 한중 1리 서쪽 700미터 지점에 있는 저수지. 마을 앞에는 노인복지회관이 있음.
  • 호랑이 바우 : 벌판에 있는 바위가 집채만하여 밑에서 보면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음.

5. 문화유적

  • 윤여익 충신문(尹汝翼 忠臣門)
    파평인 금좌 윤여익의 충성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 윤여익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趙憲)의 의병에 참여. 금산에서 싸우다가 7백의사와 함께 순절하였다. 철종 20년에 명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