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료집

보은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곳

보은의 역사

삼국시대의 보은 (삼년산군)

신라의 보은진출과 삼년산군의 설치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대국가의 성립‧발전은 만주에서 한반도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산재한 정치체들 간에 불균등한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이 발전정도를 달리하면서, 또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가지며 전개되었다. 선진적인 남만주 지역에서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구려가 등장하였다. 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진국(辰國)과 삼한(三韓)이 계기적으로 성립하였으며, 이는 후에 백제(百濟), 신라(新羅)로 통합되었다.

삼국이 각각 성장 발전하여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충북지역은 삼국간의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고 보은(報恩), 옥천(沃川)의 남부지역은 주로 백제와 신라가 각축을 벌린 곳인데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충북지역으로의 진출은 크게 두 방면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계립령(鷄立嶺)이나 죽령(竹嶺)을 넘어 남한강의 요충지인 충주(忠州)에 이르는 신라의 북진루트로서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충돌을 빚어왔다. 또 하나는 선산(善山)을 거쳐 부곡(富谷)과 원산(元山)을 지나 보은(報恩)에 이르는 통로로서 백제와 잦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신라가 충북지역에 제일 먼저 진출한 것은 보은방면으로 지금의 보은인 와산성(蛙山城)을 확보하기 위해 1세기 중반과 2세기 후반경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와산성 전투 이후 3세기 초에는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 축조되는 470년까지 보은, 옥천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신라의 세력권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의 축조와 신라의 백제공멸(攻滅)

삼년산성을 쌓은 것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의 일이었고,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에는 이찬(伊湌)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고 지금의 선산(善山)인 일선군(一善郡) 부근의 정부(丁夫) 3,000명을 동원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屈山城) 옥천 청산(沃川 靑山)을 개축하였다는 것이다. 소지마립간이 483년과 488년의 두차례에 걸쳐 일선군에 직접 순행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엄청난 국력을 기울였던 축성사업을 독려하기 위한 조치로 더욱 실감나게 해준다.

이곳은 백제의 서남쪽 통로를 통한 신라침입을 사전에 저지하고 나아가 금강유역의 서부지역을 확보하여 백제의 왕도인 공주(公州)와 부여(夫餘)를 인후부에서 겨냥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은 470년 축조된 이래 10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신라의 역사에서 커다란 자취를 나타냈던 곳이다.

관산성(菅山城) 전투(554)때에 삼년산성은 역사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성왕(聖王)(523~554)은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증흥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는 한강유역의 땅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신라의 진흥왕(眞興王)과 동맹하여 때마침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북진을 시작하였다(551). 백제는 옛 땅이었던 한강하류의 6군(郡)을 수복함으로써 그 목적을 이루었으나 도리어 신라의 기습을 받아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553).

이에 분격한 성왕은 554년 7월 가야군과 왜국 등의 세력과 힘을 합쳐 신라정벌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이 때 신라의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지금의 옥천지역인 관산성(管山城)에서 백제군을 막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삼년산군의 고간(高干)이었던 도도(都刀)가 복병을 매복하여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 백제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백제정벌에 나서는데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5만의 정병을 거느렸는데 남천정(南川停)(지금의 利川)을 출발해 삼년산성―산계리토성(山桂里土城)(보은)―장군재(옥천)―구진베루(옥천)―군서(郡西)(옥천)―마전(馬田) 금산(錦山)―탄현(炭峴)의 코스를 거쳐 7월 9일에는 황산(黃山)벌로 진격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백제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렸던 것이다. 삼년산성은 백제정벌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인 660년 9월 28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은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거쳐 위용을 갖춘 이곳 삼년산성에 머무르면서 당나라 사신인 왕문도(王文度)로 부터 당황제의 조서(詔書)를 전달받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갑자기 왕문도가 쓰러져 죽자 그 시종들이 전달의식을 마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이 건설되면서부터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위치를 청주방면으로 내주었으며, 이 곳이 군사적인 첨병기지로서의 역할은 고려시대 초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즉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날 정도로 후삼국시대에도 고려와 후백제간의 중요한 요충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보은 (삼년군)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개편과 삼년군(三年郡)의 설치

삼국통일 후 신라의 영역은 3배로 확대되었다. 당시 통일신라의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갑자기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어떻게 통치하느냐 하는 일이다. 그러한 조치로 나타난 것이 9주(州) 5소경(小京)제도의 확립이요 군사제도의 정비라고 할 수 있다.

9주 5소경 제도는 신문왕(神文王) 7년(687)에 완성이 되었고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는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한자명칭으로 개칭하였다. 주의 장관을 처음에는 군주(軍主)라 불렀으나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는 총관(摠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785)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다. 이느 주의 장관의 성격을 종래의 군시 중심에서 행정관료의 성격으로 변모되었음을 뜻한다.

현재의 보은군은 상주(尙州)에 속했으며, 보은군 회북면(懷北面)일대는 웅주(熊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州) 밑에는 군(郡)을 두고 그 아래에는 현(縣)을 설치하였다. 군(郡)에는 태수(太守)가, 현(縣)에는 현령(縣令)이나 소수(小守)가 파견되었다. 현재의 보은군은 신라시대의 삼년산군을 경덕왕(景德王) 16년(757) 12월에 단행된 한자명칭 변경조치에 따라 삼년군(三年郡)으로 개칭하였으며 상주(尙州)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회북면 지역도 백제시대의 미곡현(未谷縣)을 경덕왕대에 매곡현(昧谷縣)이라 하여 웅주(熊州)에 속하게 하였다.

김헌창(金憲昌)의 난(亂)과 삼년산성 전투

오늘의 날의 삼년산성은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 14년(822)에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으로서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군(軍)과 정부군이 서로 맞서서 크게 싸웠던 격전지로 알려진 곳이다. 당시 김헌창군의 거점이었던 웅천주(熊川州)(공주)와 서원경(西原京)(청주)을 비롯한 충청도 지방은 반군의 장악 하에 놓여 있었으나, 이 전투를 계기로 정부군은 반군의 예봉을 꺾을 수 있게 되었다.

김헌창의 난은 왕위계승과 관련 그의 부친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왕권과 귀족세력들 간의 대립에서 빚어진 정치적 갈등의 소산이었다. 김헌창은 헌덕왕 14년(822) 3월 중앙정부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고 국가를 세워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개전초에는 김헌창군이 신라 9주 5소경 중에서 5주 3소경을 장악하여 지금의 충청, 전라, 경상도의 광범위한 지역이 가담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으로 확대되었다.

관군은 장웅(張雄)을 선발대장으로 반군의 경주로의 진출을 막도록 하였다. 장웅(張雄)의 선발부대는 도동현(道冬峴)(영주)에서 처음으로 반군과 접전을 벌여 이를 격파하였고 후에 도착한 본대와 합류하여 다시 보은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반군을 격파하였고 여세를 몰아 속리산 방면을 진출하여 반군의 한 부대를 섬멸시켜 반군의 예봉을 꺾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3군의 주력부대는 성산(星山)(성주)에서 반군을 격파한 후 다른 토벌부대와 함께 반군의 거점인 웅진성(熊津城)(공주 공산성)을 포위 공격한지 10여일이 지나서 김헌창이 자살함으로써 반란은 마침내 진압되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당시 관군의 주 공격로를 이 전투의 분수령이 되었던 삼년산성과 속리산 전투를 기준으로 경주에서 삼년산성까지 공격루트를 살펴보면 도동현(道冬峴)과 성산(星山)에서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주(慶州)→영천(永川)→성주(星州)→상주(尙州)→화령(化寧)→관기(官基)→보은(報恩)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거쳐왔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보은 삼년산성에서 반군의 거점인 공주(公州) 공산성(公山城)까지의 관군의 공격로는 삼년산성(三年山城)→원남 안내산성(元南 安內山城)→옥천 서산성(沃川 西山城)→마전(馬田)→진산(珍山)→연산(連山)→석성(石城)→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의 루트로 추정된다.

법주사(法住寺)의 중창(重創)

법주사가 자리잡고 있는 속리산은 신라 때에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불렀으며 국가적 제사인 중사(中祀)와 소사(小祀)에 해당되는 곳이기도 하다. 속리산에는 많은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중에서 법주사(法住寺)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 일컬을 정도로 속리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거대한 청동 미륵불상과 팔상전 및 쌍사자석등 등 중요한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 곳이다. 특히 미륵불상은 법(法)이 머문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법주사의 상징이며 원대한 자비를 베푸는 그러한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중심지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법주사의 창건된 시기와 유래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구전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14년(553) 창건설 이다. 즉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인도에 가서 불법을 익힌 후에 불경을 흰 노새에 싣고 돌아오던 중 속리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노새가 더 이상 나가지도 않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산세를 보니 좋고 도장(道場)도 넓어 결국 이곳에 머물러 절을 지었고 법주사라 하였다 한다.

다른 하나는 8세기 후반경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인 영심(永深) 등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진표(眞表)는 고된 수행의 결과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占察經)》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받고난 후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다. 그는 다시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을 향해 가던 도중 소달구지를 만났는데 소가 진표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기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찌하여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진표는 「내가 계법(戒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다 듣고 나서 말하되 「짐승도 이러한 신념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신념이 없겠습니까?」라 하고 낫을 쥐고 스스로 머리칼을 잘랐다. 이에 진표는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戒)를 주었다.

진표는 속리산 골짜기 속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그 곳에 표시해 둔 다음 훗날 대덕(大德) 영심(永深)에게 「속리산으로 돌아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교법에 따라 중생을 제도(濟度)하라」일렀다. 이에 영심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초(吉祥草)라 하고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령(占察法令)을 열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법주사의 유물인 석연지(石蓮池),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등은 그 양식적인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인 8세기 성덕왕(聖德王) ~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법주사 경내의 배수로 공사 때에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물자료를 통해 보면 법주사는 6세기경에 소규모 사찰로 창건되었으나 미륵신앙의 도장으로 중창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8세기경의 일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법주사의 미륵신앙은 이 절의 중흥에 큰 기여를 한 진표(眞表)와 그의 법제자인 영심(永深)에 의해 발현되었던 것이다. 미륵신앙은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상생신앙(上生信仰)과 전륜성왕의 치세(治世) 때에 하생(下生)한 미륵의 설법으로 구제되기를 바라는 하생신앙(下生信仰)으로 나뉘어진다. 통일 이전의 신라에서는 전륜성왕설과 결부되어 미륵하생신앙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통일 이후 법상종(法相宗)의 주불(主佛)로서 승려와 상층인을 위한 미륵상생신앙과 내서적인 성격을 가진 일반 대중을 위한 아미타(阿彌陀) 정토신앙(淨土信仰)이 행해지게 되었다.

현재 법주사의 미륵불상이 위치한 곳이 옛 산호전(珊瑚殿) 용화전(龍華殿)의 터이다. 용화전에는 금신장육미륵상(金身丈六彌勒像)이 봉안되었고 그 전당의 규모도 중층건물로 35칸이 될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하였다. 법주사는 금산사(金山寺), 동화사(桐華寺)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법상종의 사찰로서 번성하였다.

고려시대의 보은

보은의 호족세력 - 매곡장군(昧谷將軍) 공직(龔直)

나말‧여초(羅末‧麗初) 즉 신라말기 진성여왕대(眞聖女王代)인 880년부터 고려초기인 930년대까지 약 반세기 동안은 “호족(豪族)의 시대(時代)”라고 일컬을 만큼 지방에 일정한 기반을 가지고 정치‧군사적으로 큰 비중을 가지고 있던 지방 세력가 호족(豪族)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크게 활약한 때였다.

후삼국기에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와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호족세력의 지배권이 오히려 강하게 잔존하고 있었고, 후백제나 고려에서 이곳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에는 호족세력이 향배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신라말 매곡(昧谷)(회인) 출신인 공직(龔直)은 이곳을 지배하는 호족으로 성장하여 ‘성주’ 또는 ‘장군’으로 자칭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후백제의 견훤의 지배하에 있다가 후에 고려 왕건에 투항함으로써 중서부 일대의 전세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다.

그의 세력 근거지인 매곡현(昧谷縣)이 당시 견훤과 왕건세력의 각축장이었던 중북부의 접경지역이었을 뿐아니라 공직이 이들 세력 사이에서 교묘한 처신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대‧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특이한 존재로 주목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창건하는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후백제는 이미 918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궁예의 세력권이었던 충청도지방에까지 그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 시기에 공직은 견훤에게 귀부(歸附)하여 큰아들 직달(直達)과 둘째 금서(金舒)와 딸을 견훤에게 질자(質子)로 보내며 후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편 자신의 처남이 경종이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왕건에 의해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공직은 견훤에 더욱 접근할 필요를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930년을 전후로 하여 대세가 역전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과 왕건이 직접 정예부대를 이끈 930년 1월 고창(안동)전투인데 후백제군의 대패로 끝났다. 932년 6월 공직은 견훤과의 관계를 버리고 직접 개경에 와서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공직의 입장에서는 매곡현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왕건의 입장에서는 유동적이었던 보은‧청주‧문의 등 중서부지역의 쟁패에 우위를 차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왕건은 공직에게 대상(大相)을 제수하고 백성군(白城郡) 안성(安城) 땅을 녹읍(祿邑)으로 주고 고려의 귀족인 준행(俊行)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의 대결장 - 삼년산성 전투

고려는 건국과정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후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충북일대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925년 10월에 고려 유검필(庾黔弼)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삼아 후백제 영향권에 있던 연산군(燕山君)(문의)과 임존군(任存郡) 대흥(大興)을 공략하여 후백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3천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926년 4월에 견훤은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웅진(熊津)으로 진군하게 되는데 그 결과 웅주(熊州)(공주), 운주(運州)(홍성) 등 중서부 일대의 10여개 주현이 후백제의 영향권 내에 들어갔다. 이후에도 중서부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양측간의 접전이 계속되는데 927년 3월에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運州)를 공략하였고, 928년 7월에는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곧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후백제군은 삼년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청주까지 쳐들어갔으나 왕건은 유검필 군대의 도움으로 후백제군을 청주에서 퇴각시킬 수 있었다.

928년까지만 해도 고려측의 전세는 연산진 전투를 제외하고 삼년산성‧청주, 죽령 일대에서 매우 불리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내분을 겪게 되는 930년 이후 후백제의 중서부 일대의 지배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 해 8월에 고려가 천안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고, 또 청주에 행차하여 청주나성을 축조함으로써 그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고려군의 전세역전은 무엇보다도 매곡성주(昧谷城主) 공직의 귀부(歸附)가 결정적인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중부일대가 고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공직이 귀부한 직후 932년 7월에는 왕건 자신이 일모산성(一牟山城)(문의)을 정벌하였고, 이어 934년에는 웅주(熊州)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던 것이다.

행정구역(行政區域)의 정비(整備)와 보령군(保齡郡)의 설치

고려왕조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지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成宗) 2년(983) 12목(牧)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데, 이 12목(牧) 중에 충북에는 충주(忠州)와 청주(淸州)가 포함되었다. 이어 성종(成宗) 14년(995)에는 지방 행정구역의 최고단위인 도제(道制)가 신설되었는데, 지금의 충청북도는 10도 중 중원도(中原道)에 해당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지방제도는 완성을 보게 되는데, 전국을 개성부와 경기(京畿) 및 오도 양계(5道 兩界)로 나누고 그 밑에 500여개의 도호부(都護府)‧목(牧)‧주(州)‧부(府)‧군(郡)‧현(縣)‧진(鎭)을 소속시켰다. 지금의 충청북도는 대체로 양광도(楊廣道)에 속했는데, 때로는 충청도(忠淸道)라는 명칭이 쓰여지기도 하였다.

현재의 보은군은 고려초 태조 23년(940)에 이르러 종래 신라 경덕왕대에 붙여진 삼년군(三年郡)을 보령군(保齡郡)으로 개칭하였고, 지방행정구역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현종(顯宗) 9년(1018)에는 상주목(尙州牧)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현재 보은군에 소속되어 있는 회북면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신라시대 연산군(燕山君) 영현(領縣)이던 매곡현(昧谷縣)을 회인현(懷仁縣)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청주목(淸州牧) 관할로 되었다. 그 후에 회덕(懷德)의 감무(監務)가 겸임을 하다가 우왕(禑王) 9년(1383)에 별도의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렸다.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보은

홍건적(紅巾賊)은 원말(元末)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일으킨 유적으로서, 머리에 붉은 건(巾)을 두른 까닭에 ‘홍건적’이라 불리웠다. 이들이 원군(元軍)의 공격을 받고는 고려로 밀려 들어와 두 차례에 걸쳐 전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홍건적의 1차 침입은 공민왕(恭愍王) 8년(1359) 12월,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계속 남하하여 서경(西京)을 점령하고 용강(龍岡)과 함종(咸從)까지 진출하였으나 반격에 나선 고려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였다. 이렇게 1차 침입에 참패를 당한 홍건적은 다시 재침을 기도하는데 공민왕 10년(1361) 10월 반성(潘誠)‧사류(沙劉) 등이 10여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11워 중순에는 개경의 중요 방어선을 돌파하고 하순에는 왕도 개경을 점령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부득이 복주(福州)(안동)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1362년 정월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최영(崔營)‧이성계(李成桂) 등에게 천수사(天壽寺)에 모이게 하여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마침 눈이 내려 적의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고려군이 급습하여 적장 사유(沙劉) 등 10만에 가까운 적도들을 섬멸하였다. 이에 홍건적은 수 많은 시체와 병기를 남긴 채 압록강을 건너 도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려군이 왕도 개경을 수복할 무렵 공민왕은 1362년 2월 25일 행재소(行在所)인 안동을 떠나 상주를 지나 관기에서 약 4개월간 머무르다가 8월 13일 원암을 거쳐 8월 15일에는 속리사(俗離寺)에 행차하여 통도사(通度寺)의 소장품인 불골(佛骨), 사리, 가사(袈裟)를 살핀 기록이 있다. 다시 원암―보은―회인을 거쳐 청주에서 도착한 이후 이곳에서 환도의 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어가가 상주에서 보은을 거쳐 청주로 환도하는 길에 마로면(馬老面) 관기리(官基里)에서 약 4개월간 묵고간 사실이 전해오고 있다. 현재 마로면 큰말에서 송현리(松峴里) 웃솔고개로 넘어가는 고개를 “왕래재”라 부르고 있는데, 공민왕이 상주에서 이 고개를 넘어 관기에 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또 왕은 이곳에 머물면서 앞 산에 곡식을 저장할 창고도 짓고 죄수를 다스릴 감옥도 만들도록 하였으며 성도 쌓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원앙골”은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며, “옥갈머리”는 바로 옥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로면의 소재지를 관기(官基)라 부르는 것은 공민왕이 명명한 관기(舘基)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전기의 보은

충청도에의 이속(移屬)과 군명의 개칭

조선왕조 초기 태종 13년(1413)에 고려말(高麗末)의 행정체계에 의하여 경상도 상주(尙州)에 예속되었던 5개의 군현(郡縣) 즉 옥천(沃川)‧보령(保令)‧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이 충청도(忠淸道)에 예속이 되었다.

이후 태종 16년(1416) 8월에 이조(吏曹)의 요청에 의하여, 보령(保令)이 충청도 서해안에 있는 보령(保寧)과 음(音)이 비슷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고 하여, 보은(報恩)으로 개정(改定)되었다. 이때 함경도의 청주(靑州)가 북청(北靑)으로 바뀌고, 강원도 양주(襄州)를 양양(襄陽), 영산(寧山)은 천안(天安), 보성(甫城)은 진보(眞寶), 보주(甫州)는 예천(醴泉), 횡천(橫川)은 횡성(橫城)으로 고친 것과 함께 모두 7개 읍이었다. 이로써 고려시대에 부르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까지 불리우던 보령(保令)은 한날 고호(古號)로 남고 새로이 보은(報恩)이라 칭하게 되었다.

세종대(世宗代)의 보은(報恩)‧회인(懷仁)

세종대에는 조선왕조의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어가던 시기이며, 민본사상(民本思想)에 의거하여 생산력(生産力)이 증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보은지역이 충청도 청주(淸州)로 이속(移屬)되므로서, 충청도‧경상도의 경계를 이루었던 지역 구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변화는 언어‧습속‧생활권에 이르기까지 점차 변화하여 충청도의 기질로 바뀌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중앙집권체제하의 보은‧회인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파악된 형편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보은현은 호(戶)가 327, 구(口)가 1,457로부터 612호(戶)이상으로 증가하였거나. 국역(國役)에 편성된 호구(戶口)와 실제로 존재하던 호구와 차이가 있다. 회인(懷仁)은 호(戶)146, 구(口)633으로 나타나 있다. ② 군역(軍役)에 편성된 사람들의 숫자는 보은의 경우 시위군(侍衛軍) 64, 수성군(守城軍) 1, 선군(船軍) 136명이고 회인은 시위군 12, 진군(鎭軍) 18, 선군 37명으로 군정(軍丁)에 모두 268명이 소속되었다. ③ 당시 호구(戶口)와 관련하여 토착(土着)의 성씨로는 보은의 경우 이(李)‧최(崔)‧김(金)의 3개와 임언부곡(林偃部曲)의 홍(洪)‧석(石)등 모두 5개 성씨이고, 회인은 토성(土姓)이 이(李)‧홍(洪)의 2개 성씨가 있다. ④ 회인은 토지가 척박하고 기온이 춥다고 하고, 보은은 토질이 척박하나 5곡의 재배가 적당하다고 하여 산악지대임을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보은이 보다 농업에 적당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에 생산되던 농산물은 보은고 회인에서 공통적인 것으로는 조‧팥‧교맥(蕎麥)‧배‧뽕나무‧닥나무이며, 보은의 경우와 달리 회인에서는 기장‧피‧콩‧보리가 있어 보다 잡곡위주의 농사임으 보여준다. 간전(墾田)은 보은이 5,229결(結)로 이 가운데 논이 1/3이 넘는데 비하여, 회인은 1,146결 가운데 논의 비율이 1/9에 불과하였다. ⑤ 토산물은 보은의 송이(松栮)‧신감초(辛甘草) 및 은석(銀石)이고, 회인의 석철(石鐵)‧상수정석(常水精石)이 알려져 있다. ⑥ 국가에 현물(現物)로 납입하는 공물(貢物)은 보은의 경우 벌꿀‧황밀과 버섯‧대추‧호도‧송자(松子) 등을 비롯하여 칠‧지초와 짐승 가죽으로 다양하나, 회인은 단순하였다. 약재로는 회인의 백부자(白附子) 하나에 비하여 보은은 연꽃술‧인삼‧오가피‧백복령‧당귀‧위령선‧안식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⑦ 각 고을에 도기소(陶器所)가 있어 그릇을 생산하였는데, 보은은 외임리(外任里)였고 회인은 둔안리(芚安里)에서 생산했는데 품질은 모두 하품(下品)에 속하였다. ⑧ 봉수로(烽燧路)는 고려시대의 것을 이용하여 금적산(金積山)에서 청산(靑山)의 박달라산(朴達羅山) 봉화를 받아 북(北)으로 회인의 용산참(龍山站)을 거쳐 청주(淸州) 상령성(上嶺城)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⑨ 보은의 오정산석성(烏頂山石城)은 아직도 유사시에 대비하는 중요한 입보처(入保處)로서 군창(軍倉)이 설치되어 있었고, 회인의 호참산석성(虎站山石城)도 입보용(入保用)의 산성(山城)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⑩ 당시 두 고을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은 육로(陸路)로 아산만(牙山灣)에 이르러 다시 해로(海路)로 운송하였다. 15세기 중엽부터는 충주(忠州)에 이르러 강선(江船)으로 운반하게 되었다. ⑪ 주요한 관도(官道)는 역(驛)이 보은현 경내의 원암(元巖)과 함림역(含林驛)이 있었으므로 청주~보은~청산을 경유하는 통로가 간선(幹線)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⑫ 월경지(越境地)가 있고, 특수한 행정구역이 아직도 존재하였다. 월경지는 공물의 배정과도 관계가 있는 곳으로 청산현(靑山縣)에 소속된 주성부곡(酒城部曲)이 있었다. 부곡은 임언부곡(林偃部曲 : 현 임한리 주변)이 있었는데, 차츰 직촌화(直村化)되어 갔다.

15세기 후반의 보은‧회인

문종(文宗)이 즉위한 1450년으로부터 연산군(燕山君)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서는 세조의 속리산(俗離山)행차와 복천사(福泉寺) 경영을 비롯하여 이 고장이 한때 주목을 받기도 하였고, 조선왕조 초기의 제도‧문물이 갖추어지면서 장차 이고장에도 문풍(文風)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 시기였다.

문종(文宗)이 세종(世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승(僧) 신미(信眉)는 속리산에 복천사(福泉寺)를 개창하고 있었는데, 왕은 이때 감사(監司) 권극화(權克和)에게 단청하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 당시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사풍(士風)에 의하여 커다란 정치적 문제로 조야(朝野)가 떠들석하였다.

1470년(성종원년)에 이르러 군액(軍額)이 경정(更定)되었는데, 이때 보은은 본디 688명이었다가 650명으로 되고, 회인은 188명에서 150명으로 조정되었다. 그후 성종3년에는 다시 보은이 580명, 회인은 100명으로 조정되었다. 이들 군사(軍士)들이 중앙군(中央軍)에 있어서는 오위(五衛) 가운데 중위(中衛)에 해당되는 의흥위(義興衛)에 소속되었다. 위(衛)에는 중(中)‧좌(左)‧우(右)‧전(前)‧후(後)의 5부(部)로 구성되었는데, 보은‧회인은 청주진관(淸州鎭管)이므로 전부(前部)에 소속되었다.

15세기 후반에 보은지방에는 문풍(文風)이 높아지게 되는데 강원감사(江原監司)까지 지낸 한유문(韓有紋)이 보은땅에 살게 되었고,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낸 김타(金沱)가 살면서 유교적 소양에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윽고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서는 사천(私踐)신분인 막동(莫同)이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니, 이때 충청도가 타도에 비교하여 향약(鄕約)이 잘 시행된다고 하고, 김정(金淨)과 같은 사림(士林)이 등장하여 새로운 기운으로 훈구파(勳舊派)에 대해 비판적 자세로 위민정치(爲民政治)르 주도하게 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훈구대신이던 홍윤성(洪允成)은 회인사람이었다. 회인에서도 유풍(儒風)이 일어나 이우(李祐)와 같은 효자가 나타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세조(世祖)의 속리산(俗離山) 행행(幸行)

세조(世祖) 9년(1464) 12월 왕은 정현조(鄭顯祖)와 김개(金漑)로 하여금 온양온정(溫陽溫井)의 행궁(行宮)을 돌아보고 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음달인 1465년 봄에 행행(幸行)키 위한 일이었다. 2월에 이르러 도성에 머물며 지킬 사람들을 임명하고 왕과 중궁(中宮)이 온양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광주(廣州) 문현산(門縣山)에 이르러 사냥하는 구경을 하고, 죽산(竹山) 연방(蓮坊)과 진천(鎭川) 광석(廣石)을 거쳐 청주(淸州) 초수(椒水)(현재의 초정약수)에 이르르게 되었다. 이러한 거동을 보아 당초 온양온정(溫陽溫井)에 간다는 것은 일종의 암행(暗行)을 위한 풍문에 불과하였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세조의 순행은 날자별로 살펴보면,

*병오(丙午)일 : 청주에 도착 노인(老人)‧유생(儒生)‧창기(娼妓)들이 가요(歌謠)를 받침. 노인(老人)들에게 주육(酒肉)을 내림. *기유(己酉)일 : 청주에서 출발하여 저녁에 회인에 도착. (이때 피반령(皮盤嶺)을 넘어감) *경술(庚戌)일 : 보은현 동헌(東軒)을 지나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도착했다. 병풍송(屛風松)이 지금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이다. 이때 승려(僧侶) 신미(信眉)가 배알하고 떡 150쟁반을 바치니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신해(辛亥)일 : 속리사(俗離寺)에 행차하고, 또 복천사(福泉寺)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지금의 福泉庵)에는 쌀 300석, 노비 30명, 토지 200결을 하사하고, 속리사(지금의 法住寺)에는 쌀과 콩 30석을 하사한 다음 행궁(行宮)에 돌아왔다. 이러한 실록(實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이 곳의 행차와 관계되는 흔적으로 훗날 많은 일화와 얘깃거리로 남아있게 되었다. 특히 정이품송(正二品松)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사림(士林)의 성장과 보은

세종대(世宗代)부터 왕조(王朝)가 안정되어 학문을 장려하고, 다시 성종대(成宗代)에 이르러 문운(文運)이 크게 일어나는 사회 분위기에 따라 지방에 은거(隱居)하였던 유학자(儒學者)들이 차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회인을 본관으로 한 홍윤성(洪允成)이 세조(世祖)를 도와 훈구대신(勳舊大臣)이 된 것과는 달리 보은에 있어서는 보은을 본관으로 한 김태암(金泰岩)과 경주김씨인 김정(金淨), 강릉최씨인 최수성(崔壽峸), 능성구씨인 구수복(具壽福) 등에 의해 싹이 트게되었다.

김태암(1477~1554)과 김정(1486~1521), 구수복(1491~1545)과 그 아우 구수담(1500~1550), 최수성(1487~1521) 등이 그들로서 모두 중종(中宗) 14(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와 관계가 깊은 인물들이다.

이중 김정(金淨)은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나 연산군(燕山君) 5년 14세때 별시초시(別試初試)에 장원하고 회덕(懷德)의 법천사(法泉寺)에서 공부하고 5년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그후 중종원년에 고봉정사(孤峯精舍)에서 최수성‧구수복 등과 함께 강학(講學)하니 지금의 삼현정(三賢亭)터가 이들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듬해에 별시갑과(別試甲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신진기예(新進氣銳)로서 당시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서 호당(湖堂)에 뽑이면서 밖에서는 박상(朴祥)과 소세양(蘇世讓)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중종 9년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이듬해는 담양부사(潭陽符使)인 박상(朴祥)과 신비(愼妃) 복위가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려 당시 집정대신(執政大臣)들의 잘못을 공격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함림역(含林驛)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이때 조광조(趙光祖)의 신구(伸救)와 왕의 허락으로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간절한 왕명으로 부제학(副堤學)이 되고 김굉필(金宏弼)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조광조와 함께 주장하기도 하고 향약(鄕約)을 시행하는 등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고자 애쓰게 되었다.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면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건의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정치를 건의하다가 드디어 훈구세력(勳舊勢力)의 구화(構禍)에 의해 사림세력(士林勢力)이 큰 화(禍)를 당하는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1519년 11월에 곤장을 맞고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는데, 가까운 곳에 계신 모친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금산군수(錦山郡守) 정웅(鄭熊)에게 얘기하고 잠시 어머니를 뵙고 오던 중, 진도(珍島)로 유배처를 옮기려고 온 도사(都事) 황세헌(黃世獻)을 따라 다시 진도(珍島)로 다시 제주(濟州)로 옮겨가게 되었다. 거기서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을 짓는 등 보내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후 그를 추모하는 지방의 사림(士林)들에 의해 서원(書院)이 세워지고 사림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크게 숭앙의 대상이 되고 호서사림(湖西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활동하던 최수성(崔壽峸)은 기묘사화로 과거를 포기하였으나 2년 뒤의 신사무옥(辛巳誣獄)에서 역시 사형을 받았으며, 구수복(具壽福)은 기묘년에 삭직(削職)되고, 1533년 이준경(李浚慶)과 동생 수담(壽聃)의 노력으로 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복직된 후 죽어갔고 김태암(金泰岩)은 삭직(削職)된 뒤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후 보은지방은 이들 초기의 사림(士林)과 그들과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사림들이 맥을 이었으니, 조헌(趙憲)과 성운(成運)의 영도하에 많은 사림들이 있었으나, 1592년의 왜란(倭亂)으로 충성심을 불태우며 의병(義兵)에 가담하여 대외적 민족항쟁(民族抗爭)의 대열이 이루어진 것도 사림의 성장과 그 의식의 계승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상현서원의 창건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보은지역에는 앞서 김정(金淨)등에 의해 뿌려진 성리학의 씨앗이 움터서 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 등이 사림(士林)의 전통을 이어갔다. 성운(成運)은 보은 북실 종곡(鐘谷)에 은거하여 속세에 나오지 않았고, 성제원(成悌元)은 공주(公州)에서 태어나 후일 보은현감을 지냈다.

명종(明宗)은 학문을 사랑하고 초야(草野)에 숨은 선비들을 많이 등용하였는데, 명종 7년(1552)에 전국에서 명망높은 선비를 추천토록 하였다. 이듬해 5월 성제원(成悌元)을 으뜸으로 성수침(成守琛)‧조식(曺植)‧이희안(李希顔)‧조욱(趙昱) 등 5명이 육조구비(六條具備)의 인물로 추천되었다. 육조(六條)란 경명(經明)‧행수(行修)‧순정(純正)‧근근(勤謹)‧노성(老成)‧온화(溫和)로 유학자로서의 언행(言行)과 교양(敎養)을 갖춘 모범인물이었다. 성제원은 보은현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첫 번이자 마지막 벼슬인 보은현감을 맡아서는 술을 마셔가며 일을 보았으나 교활한 향리(鄕吏)들이 무서워하였으며, 간사한 백성들도 도덕(道德)에 복종하여 치적(治積)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보은에 있으면서 성운(成運)이나 조식(曺植)과 함께 당시 사림(士林)을 대표하는 의리있는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으므로, 그후 향사당(鄕祠堂)에 배향(配享)되었다.

성운(成運)은 보은 종곡에 은거하여 있다가 1566년(명종 21) 5월에 육조구비지인(六條具備之人)으로 천거되었다. 그는 처음엔 명문가의 아들답게 부모의 뜻에 따라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과거에 뜻을 버리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려고 처가(妻家)로 내려온 것이었다. 보은에 와서 산천과 경치를 사랑하여 가야금과 책과 술과 시를 벗삼아, 오직 의리가 있는 사람과 어울리니 사람들이 모두 진솔한 학자로 추앙하였다. 왕의 부름에도 끝내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인재를 등용하고자 특별한 부름을 했을 때 경상도의 이항(李恒)과 충청도의 성운(成運)이 그 대상이었으니, 당시 충청도를 대표하는 학자였던 셈이다. 성제원과 조식이 가장 친한 친구였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보은에는 인재가 몰려들었으니, 후일 의병활동을 한 조헌(趙憲)이 1582년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보은현감이 된 것도 그 하나였다. 그는 율곡 이이(李珥)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은현감을 지내면서 정사를 잘 돌보았으며, 이어 옥천 안내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후생을 가르쳤다. 김정‧성제원‧성운의 뒤를 이어 이지방 사림의 구심점이 된 것이다. 이지방에 살면서 사림의 대표가 된 김정과 성운은 삼년성서원(三年城書院)이란 사우(祠宇)에 봉사(奉祠)되었고 보은현감을 지낸 성제원과 조헌은 향사당(鄕祠堂)에 배향(配享)되었다가 1681(숙종7)년에 이르러 네분 모두가 상현서원에 합사(合祠)되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후기에는 상현서원이 이지방 사림의 근거지로 성리학의 맥을 잇는 사림문화(士林文化)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1592년에 미증유(未曾有)의 왜침(倭侵)이 일어나 삽시간에 국토가 유린당하게 되자, 조헌은 수하의 제자들과 이웃의 백성들에게 왜적을 토벌하기 위한 의병(義兵)에 참여하도록 의(義)로써 고(告)하고 일어서게 되었다.

왜란(倭亂)‧호란(胡亂)을 겪은 보은

1592(선조25)년 4월에 왜(倭)의 침입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조선왕조의 실정으로 대규모 침략에 대해 중도에서 막을 수가 없었다. 왜는 주력군을 조령로(鳥嶺路)로 하고, 죽령로(竹嶺路)과 추풍령로(秋風嶺路)로 북상하였다. 이 가운데 추풍령로는 황간‧영동‧옥천을 거쳐 북상하였으므로 보은도 이러한 길목으로 전략상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게 되었다.

그해 6월에는 왜가 성주(星州) 무계현(茂溪懸)에서 금산(金山)‧지례(知禮)를 지나 무주(茂朱)‧용담(龍潭)을 지나 금산에 둔치고, 다시 옥천‧영동을 분탕하여 청주에 둔거(屯據)하여 노략질을 하게 되었다. 조헌은 이미 5월부터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도 지방에서는 그 첫 의병모집에 나섰던 것인데 6월에는 김절(金節)‧박충검(朴忠檢) 등을 비롯하여 전승업(全承業)등을 중심으로 수백명이 보은의 차령(車嶺)에서 왜와 부딪쳐서 격퇴시키는 향토방위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6월 12일경에는 호서지방 뿐만 아니라 영남지방에까지 의병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었으나, 관군(官軍)과의 관계가 여의치 못하였다.

드디어 문생(門生)을 중심으로 1,600여명의 의병은 7월 4일 웅진용당(熊津龍當)에서 제(祭)를 올리고 의기(義旗)를 세웠다. 의병장은 조헌이었고, 이광윤(李光輪)과 정민수(鄭民秀)가 수백명씩 모집한 의병을 이끌고 참모가 되었으며, 구항(具恒)은 참모로 군수(軍需)를 조달하였다. 이밖에도 부서를 정하여 본격적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해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한 전투에 참여케 되었다. 청주성을 탈환한 의병은 이어서 금산(錦山)에 둔치고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공격하다가 700의사가 장렬히 전사하였던 것이다.

당시 보은지역은 속리산의 험준함으로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1593년까지의 피해를 입은 고을에 보은이 포함된 것을 보면, 보은에 왜가 분탕질을 하자 읍내일원의 주민들은 주변의 피난처로 피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회인은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은 고을이었다. 이는 보은이 상주에서 청주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으로 왜군이 점령하여 주둔하였지만, 적은 병력으로 보급로의 일부를 지키는 수준이었다.

1597년에 왜가 다시 침입하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일시 왜군은 청주‧공주를 거쳐 북상하였다가 다시 남하하게 되었다. 이때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의 보고에는 금강을 건너는 형강(荊江)에서 명군(明軍)이 왜를 쳐부셨으나, 보은에는 왜가 가득차게 둔진(屯陳)하였다고 하였고, 병사 소속의 장졸(將卒)들도 숲이 우거진 산속에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해 9월의 경우 호서일도(湖西一道)는 새로 병화(兵火)를 입어 살고있는 백성이 죽어가니 10중 한둘도 안되어 들판에 벼가 있어도 수확할 사람이 없다고 과장되게 표현되고 있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 당시의 현감으로는 1605년의 신수기(申守淇)와 교대된 이인기(李麟奇)가 기록에 보일 뿐이다.

왜란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듯하다가 이제는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이 강성해져서 위협이 되었다. 정부는 광해군대(光海君代)에는 명(明)에 대하여 사대(事大)의 예(禮)를 다하면서도 후금(後金)의 세력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말미암아 서인정권(西人政權)이 성립되자 외교정책에 있어 숭명사대(崇明事大)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전국에 걸쳐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결국 청(淸)에 굴복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9년 (광해원년) 3월에 회덕(懷德)에 살던 진사(進士) 이시직(李時稷)등이 김정(金淨)을 모신 삼년성서원(三年城書院)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상현서원(象賢書院)의 액(額)이 내려지고, 이어 노응탁(盧應晫)이 상소하여 조헌(趙憲)을 모신 사우(祠宇)에도 사액(賜額)을 내릴 것을 요청하자 표충사(表忠祠) 액(額)이 내려지는 등 란후(亂後)의 처리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즈음인 1611년 2월에는 폐읍지경이였던 회인현이 복설(復設)되었다.

인조대(仁祖代)에 이르러서는 1625년 보은현감은 서운준(徐雲駿)의 임명기사가 보이고, 1628년 5월에는 보은에 새알만큼 크기의 우박이 내렸는가하면, 8월에는 서리가 일찍 내렸다고 하였다. 1635년 (인조13) 2월에는 법주사의 장육불(丈六佛)이 땀을 흘리는 이변이 있었고, 1637년에는 회인에 큰 장마가 나고, 1647년과 이듬해에는 금강이 범람하는 장마가 있어 집중호우가 퍼붓는 바람에 농작물에 큰 피해가 나고 산이 무너져 내리며, 비바람이 불어 큰 피해가 있었으니, 이때 태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대에 이르러서 속리산의 법주사는 대대적인 중창(重創)을 보게되는데, 인조2(1624)년에 팔상전(捌相殿)을 비롯하여 이후 대웅전(大雄殿)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졌다. 이러한 법주사를 중심한 불교의 중흥은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명실상부한 「호서제일가람」으로서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보은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북벌을 계획하는 상황에 이르러 보은현감 이하악(李河岳)이 부임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동법이 호서지방에 실시되고 중앙의 군사제도 개편에 따른 새로운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대동법은 공물(貢物)을 납부하는 제도를 개혁한 것으로서 당초 품목별로 정해진 수량만큼 매년 납부하는 공물은 운반도중에 썩거나 운반의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경주인(京主人)이라 불리우는 세력있는 사람들이 대신 납부하고는 시골에 내려와서 몇곱절로 받아내는 폐단이 대단하였다. 정부에서는 공물을 쌀로 대신 납부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이이(李珥) 등에 의해 제창된 이후 이원익(李元翼) 등에 의해 대동법의 시행이 강력히 주장되었다.

왜란 이후 공물을 수납하는 장부인 공안(貢案)이 문란해 있어서 다과(多寡)가 균등하지 못하고 향리들의 부패로 백성들이 매우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토지를 가지지 못한 농민도 호(戶)를 구성하면 공물을 납부할 의무가 있었던 폐단을 고쳐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 공물대신 미(米)‧포(布)‧전(錢)으로 납부하면 중앙에서 정부의 각 부서에서 필요한 물자를 전문적인 공납업자인 공인(貢人)을 통해 조달받는 방법이었다. 당시 영의정 김육(金堉)의 강력한 주장으로 먼저 호서지방에서 실시하였던 것이였다.

보은과 회인에 있어서의 대동법에 의한 공가미포(貢價米布)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대략 18세기 중엽인 1759년(영조35)의 기준으로 보면 보은의 호구(戶口)는 4547호, 인구는 14,492명이었고, 회인은 964호 2,854명으로 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 등을 납부하였으나 토지를 가진 농민에게 대부분의 세(稅)가 집중되고 또 아직 별공(別貢)이 진공(進貢)이라하여 남아있는 상태였다.

진공은 토산물을 월령(月令)에 따라 바치던 것으로 현물로 바쳤는데 보은과 회인에서 내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① 보은은 영동과 함께 3년에 두 번 산돼지 한 마리씩 ② 정월에는 보은에서 청밀(淸蜜:꿀)3승(升)‧백급(白芨:대왕꿀)3양‧태수(胎水)1합(合) ③ 2월에는 회인에서 청밀(꿀)2승 ④ 3월에는 보은에서 백출(白朮)3양5전‧길경(桔梗:도라지)10양‧황백피(黃栢皮)6양‧전호(前胡)9양‧백급(白芨)2양‧진령(蓁笭)10양‧모향(茅香)8근6양을, 회인에서는 모향(茅香)8근6양‧전호(前胡)1근5양‧길경(도라지)9양‧진피(陳皮)10양‧백급2양‧건지황(乾地黃)2양 ⑤ 6월에는 보은에서 금은화(金銀花)3양‧봉리괴(封裏槐)1좌 ⑥ 7월에는 보은에서 안식향(安息香)1근14양‧백급(白芨)3양‧태수(胎水)2합, 회인에서는 안식향 1근5양‧백급2양4전‧태수1합‧청밀2승 ⑦ 8월에는 보은에서 대추2두 ⑧ 9월에는 보은에서 청밀5승 ⑨ 10월에는 보은에서 전호11양‧오미자5양8전‧금은화1양, 회인에서 대추1두5승‧전호14양‧산악(山嶽)5양8전‧유지(油紙)1장(張) ⑩ 11월에는 보은에서 오가피11양‧위령선6양‧연혈(蓮趐)4전 ⑪ 진하진상(陳賀進上)으로 보은에서 대추2두‧산꿩6마리, 회인에서 대추2두2승‧마른꿩4마리 ⑫ 도계진상(到界進上)으로 보은에서 잣6두6승, 회인에서 꿀1승2합‧산꿩3마리

이상에서 보듯이 토산의 공물은 아직도 큰 부담이었다. 위에서 특히 진하진상은 조정에서 청(淸)에 보내는 진하사(陳賀使)라는 사신을 보낼 때 진상한 것이고, 도계진상은 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 접대용으로 바치는 공물로 이때 대추와 꿩과 잣이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院)‧사(祠)의 증가와 훼철

16세기는 문화‧사상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하나의 큰 변혁기였다. 불교를 대신하여 새왕조의 지도원리가 된 성리학은 적어도 15세기 동안은 일정한 기능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의 불교적 생활양식을 유교적으로 바꾸어 놓는 데 현실적으로 작용하였으며 의리(義理)정신을 내세워 집권사대부층의 귀족화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왕권강화도 일정한 한계에서나마 억제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 등 사회적, 경제적 제도개혁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면서 왕조초기의 지배체제 확립에 일정한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화(士禍)가 연속되고 특히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유교적 지치주의의 이상이 좌절됨에 따라 성리학의 현실적 기능이 약화되고 반대로 형이상학적 관념론적 이기론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성리학 기능의 변화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서원과 향약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서원의 발생은 성리학 성격변화의 뒷받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상호 연관관계가 있는 당쟁의 후방기지적 역할도 다했다.

초기의 서원중 유명한 것은 1543년(중종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의 고향인 풍기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후 명종 때 이황(李滉)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과 서적(書籍)‧전토(田土)‧노비(奴婢)가 하사되어 면세혜택을 주니 소위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였다. 이후 서원이 계속 증가되어 영조때 6백여개나 되어 그 폐가 컸으며 흥선대원군이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보은지방에는 1555년(명종10) 보은현감 성제원(成悌元)이 지방 사림의 공의로 삼년성안에 서원을 창건하여 김정(金淨)을 봉안하고 삼년성서원(三年城書院)이라 하였는데 1610년(광해군2)에 「상현(象賢)」이라는 사액을 받으니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창건된 서원이었다. 1681년에는 성제원(成悌元)과 조헌(趙憲)을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상현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1871년(고종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강당은 보은향교로 옮기였다. 1876년에 다시 재건하여 현재 충청북도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보은지방에 건립되었던 원(院)‧사(祠)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후율사(後栗祠) : 수한면 차정리 1832년(순조32)에 창건된 것으로 1868년(고종5)에 조령(朝令)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894년(고종31)에 재건된 것이다. 조헌(趙憲)등 21현(賢)을 봉향 ② 금화서원(金華書院) : 삼승면 선곡리 1814년(순조14)에 창건된 것으로 1871년(고종8) 훼철되었다가 1917년에 재건된 것이다. 최운(崔澐)등 5현을 배향 ③ 백봉사(栢峯祠) : 보은읍 산성리 1868년(고종5)에 창건된 것이다. 이천계(李天啓)를 배향 ④ 병산원(屛山院) : 1737년(영조13)에 마로면 기대리에 창건하였다가 1801년(순조2)에 구병산 아래로 이건하였으나 1871년에 훼철되었다. 김자수(金自粹)등 5현을 배향하였다. ⑤ 탁청사(濯淸祠) 1869년(고종6)에 보은읍 어암리에 창건하였으나 1871년 훼철되었다. 김상진(金相進) 등 3현을 배향하였다. ⑥ 산앙사(山仰祠) 1707년(숙종33) 삼승면 서원리에 창건하였다가 1871년 훼철되었다. 송시열(宋時烈)등 3현을 배향하였다.

보은향약(報恩鄕約)의 시행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농민들은 군역(軍役)‧환곡(還穀)‧사채(私債)의 과도한 부담으로 농민의 농토이탈이 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였다. 이같이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수령들은 향약을 실시하여 농민의 토지이탈, 신분제의 동요 등을 막고 농민들을 각각 향촌사회에 바짝 얽어매고 그들을 농업공동체적인 결합관계로 결속하므로서 조세원을 확보하고 그들에게 권농을 강조함으로써 최소한의 농촌 경제를 안정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필요성에 의하여 18세기에 들어와서 각 주현(州縣)의 수령들이 다투어 향약을 제정하고 시행하게 되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향약이 보은향약이다.

보은향약은 보은군수로 1746년(영조22) 4월부터 1750년(영조26) 4월까지 만 4년간 재임한 김홍득(金弘得)이 1747년(영조23) 9월 15일에 입약하여 시행한 것이다. 김홍득은 서문에서 율곡(栗谷)이 청주에서 시행한 「서원향약」을 주로 하여 당시 향촌사회의 풍속을 참작하고 마침 새로 반포된 「정경(政經)」의 내용과 취지를 향약에 많이 반영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정경」은 송(宋)의 진덕수(眞德秀)가 정사(政事)를 하는데 상경(常經)이 되는 원칙과 수령들의 임무를 설명한 책으로 보은향약을 만든 해인 영조23년 정월에 왕명으로 예문관에서 간행한 것이다.

향약은 「향약서(鄕約序)」「향약조목(鄕約條目)」「향약후부록(鄕約後附錄)」「별록유민인(別錄諭民人)」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향약조목은 다시〈조목(條目)〉〈향회독약법(鄕會讀約法)〉〈시벌지예(施罰之例)〉로 나누어져 있다. 〈향약조목〉〈향약독약법〉은 주로 「서원향약」을 반영하고 〈시벌지예〉「해주일향약속」을 가감하여 향촌사회에서의 양반토호 향리들의 비리를 규제하고 있다. 〈별록유민인〉등은 농민들에게 수이(遂利)를 경계하고 권농의 필요성과 소농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도를 자세히 설명하여 농업공동체적인 생활을 권장하고 있다.

조선후기 보은의 생활상

보은과 회인은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청주목(淸州牧) 관할로서 현감은 종6품의 음보(蔭補)였다. 현감은 왕을 대신하여 관할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 이미 조선초기부터 수령칠사(守令七事)라 하여 7가지 직무가 있었다. 현감 아래로는 수령을 보좌하는 향청(鄕廳)이 있어서 좌수(座首)1인과 별감(別監)2인이 있었는데 회인은 별감이 1인이었다. 행정을 맡은 군관(軍官)‧아전(衙前)‧지인(知人)‧사령(使令)과 관노비(官奴婢)가 있었다. 군관은 보은현에 20인 회인현에 8인이 있었는데 보은의 1871년에는 4인으로 나타나 있어서 시기에 따라 인원수가 변하였던 듯하다. 군관은 고을의 치안‧호송‧의장‧수비를 맡고 있었다. 아전과 지인은 고을의 행정을 담당한 실무자이며 중앙정부의 6조(六曺)를 모방하여 6방(房)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지바의 향리로서 신분이 세습적이고 지식과 기능도 전문화되어 있었다. 이(吏)‧호(戶)‧예(禮)‧병(兵)‧형(形)‧공(工)의 6방 가운데 호장(戶長)‧이방(吏房)‧수형방(首形房)을 특히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였고 현감이 부재시에는 호장이 총책임자였다. 보은현은 아전 30인과 지인25인, 회인현에는 아전 14인과 지인9인이 있었다.

호구(戶口)의 상황을 보면 당시 가장 큰 중심지인 관아의 소재지와 읍내는 200호 전후의 취락에 불과하고, 리에서 큰 규모가 80~90호 작은규모는 10미만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또한 어려운 농민생활의 구휼(救恤)을 위하여 환곡(還穀)이 시행되었다. 이는 봄에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후인 9월에 창고에 수납하게하는 것이었는데, 보은의 경우 18세기 후반에 쌀 1,284석(石) 6두(斗)와 피곡(皮穀) 9,132석 11두, 그리고 영진곡(營賑穀)이 1,517석 8두의 양곡이 이에 해당되었다. 회인현은 회부미(會付米) 111석, 피곡(皮穀) 408석과 진곡(賑穀) 200석, 영곡(營穀) 2석, 피곡(皮穀) 456석으로 10월에 개창(開倉)하여 12월에 봉창(封創)하도록 되어있었다.

16세기 이후로 물화의 유통이 활발하여졌으나 17세기 이후 대동법의 실시로 말미암아 화폐경제로의 가속도가 붙었다. 지방의 주요도시에는 전업적인 상품교환을 직업으로 하는 상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행위는 상설시장이 아닌 정기시장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회인은 18세기 후반에 두산시(斗山市)가 북면에서 열렸는데 3일과 8일이 개시일이였다는 읍지의 기록으로 보아 읍내보다 먼저 생긴 듯하다. 1860년대에 회인은 읍내의 장이 4일과 9일, 두산의 장터가 3일과 8일에 열리고 있었다. 보은에서는 읍내가 5일과 10일, 원암(元岩)장이 2일과 7일, 관기장이 1일과 6일, 마로장이 4일과 9일열렸다. 이를 보면 당시 초하루에서 열흘까지 두 번씩의 장이 열리므로 그 돌아가는 순서는 ①관기장 ②원암장 ③두산장 ④마로장‧회인장 ⑤보은장의 순서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와 이웃한 회남‧안내‧안남‧청산‧화령‧미원 등지와 연접되어 교역이 활성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사회사정과 보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연이어 일본과 청의 침략을 받아 일어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조선사회는 크게 동요하였다. 전란 중에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되었고 그 결과 국가 재정이 궁핍할 정도로 경제 상태가 악화되었다. 사회체제가 기존질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적 사회발전 과정과 맞물려서 전근대 사회구성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충청도 남서부에 위치한 보은의 사회상도 그 변화되는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보은이 근대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의 변화상을 정리한다.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변화

조선사회의 기본구조는 상하관계의 질서를 갖는 신분제를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었다. 양반‧중인‧평민‧천민 네 개의 신분층간에는 모든 면에서 차등을 두게 하였고, 특권을 독점한 층은 최상급 신분인 양반이었다.

양반 가문에 태어나면 사서삼경과 시문 등을 공부행서 과거를 볼 수 있었다. 과거 급게자는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또 음직이라고 해서 선대의 음덕에 의해 관직에 나아가는 기회도 주어졌다. 이 양반층은 인구의 1할 이내였다. 피지배층은 평민은 5할, 그리고 천민은 4할 정도여서 적은 수의 양반이 지배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 이후 17세기 말에는 양반이 8.3%로 불과했는데 18세기 말에는 37.7%로 많아졌고, 19세기 중엽에는 무려 65.5%나 되었다. 반면 평민과 천민의 비율은 급속히 줄어들어 각각 32.8%와 1.7%로 감소했다. 이 수치는 특정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신분변화의 방향을 보여주는 까닭에 주목된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정부는 양란이후 사회 경제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써야 공공경비를 공공연히 관직을 팔아서 충당하는 편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실제로 공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벼슬이 아니라 직책만 기록한 공명첩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산 사람은 관아에서 인정하는 양반에 되었으며, 불법으로 족보를 매매하여 양반행세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천민이 관청에 얼마간 재물을 내면 속량(贖良)이라고 해서 평민으로 인정해 주었다.

농촌경제의 변화는 농법 개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에 크게 힘입고 있었다. 벼농사를 할 때 종래 널리 써왔던 직파법은 볍씨를 심어서 수확할 때까지 논에서 직접 재배하는 방법이었다. 이 농법은 일품이 많이 들어 양란(兩亂) 이후 인구가 줄어 노동력이 부족하자 농민들은 모내기 농법으로 점차 확산시켜 생산력을 키워갔다.

조선후기의 변화 물결 중 하나가 시장이 생겨서 장사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유통경제가 발달한 것이다. 상품으로 잘팔리는 작물은 채소를 비롯하여 인삼같은 약초 그리고 기호식품인 담배 등이 있다. 특히 면화는 중요한 상업작물이었다. 보은지역의 대추도 지역특산물로서 널리 팔려 나갔다.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절박한 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문란한 조세수취의 정치 문제에 있었다. 정부는 세금을 안정되게 걷기위해 삼정을 총액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제도는 농민들에게 수취업무를 맡은 지방관과 향리, 그리고 이에 같이 관여한 세력가들이 마음대로 수탈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환곡은 춘궁기에 굶는 농민을 구휼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는데, 임란 이후 나라 살림이 궁핍해지자 가을에 덧붙여 받는 이자를 재정에 보태 쓰게 한 이후 세금으로 변했다. 군정의 문제는 두드러졌다. 군역세는 평민만 내는 신분세였는데 평민 가운데 양반으로 상승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 수가 적어졌어도 총액을 다 내야하는 것은 변함없었다. 이에 따라 두세 번 거듭내거나, 어린아이와 죽은이의 몫도 계속 맡아냈고, 극빈자와 도망자의 몫까지 집안과 동네에서 억지로 내야만 했다.

정치체제의 위기

조선의 집권 관료체제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매우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안으로는 양반 지배세력이 내부로부터 분열되었고, 나라의 제정은 만성적으로 부족하여 권력의 기반까지 허물러져 갔다. 밖으로는 서양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일본에 강요하여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은 후 근대시설을 갖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상품을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군시 침략까지 강행하고 있었다. 조선도 이같은 침략 위험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는 유교사상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바탕으로 양반 관료층에 의해 통치되는 체제였다. 조선본래의 정치가 안정되려면 왕권과 양반관료층간의 기울지 않은 공존관계가 전제되는 것이고, 양반관료층 내부에서 각 세력 간 균형이 잡혀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지배층의 내부의 안정된 균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양란 이후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어려운 문제가 산적하자 그 해결 방법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졌고, 양반 관료들은 붕당을 형성해서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 결과 한 당파가 권력을 독점해서 일부 양반이 높은 관직을 독점해간 반면에 대부분의 양반이 정권에서 아예 밀려나게 되었다.

정치면의 위기느 국내 요인과 더불어 국제정치면에서도 야기되었다. 중화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 사실은 조선에도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조선 근해에도 서양의 기선이 여러차례 출몰하여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북경을 거쳐서 들어온 천주교는 성리학에서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상하관계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내용 때문에 지배층에게 커다란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켜서 이단을 배격하는 척사론이 대두되었다.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도 커져갔다. 임진왜란 당시 입었던 혹독한 피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누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과 국교를 맺고 조선과 새로운 근대 형태의 통상무역을 하려는 시도는 의혹감을 불러 일으켰다.

19세기 보은과 회인의 사회사정

19세기에 이르는 조선후기의 보은 사정을 상세히 전해주는 자료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없어 내용이 미약하다. 19세기 전반 보은과 회인은 기존 지배 질서가 동요하는 가운데 양반이 중심이 된 사회 구조가 유지되었다. 보은 경내의 정치질서는 보은 관아(官衙)가 정점이 되어 특유의 관계가 이루어졌다. 중앙에서 파견되는 지방관인 군수는 음직(蔭職)으로 환로(宦路)에 나아가 정5품 또는 정4품의 품계로 오른 관리가 보임 되었고, 회인현은 음직 6품관이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회인과 보은은 서울에서 청주를 거쳐 청산을 가는 교통로의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다. 청주에서 가는 길의 주요 지점은 청주→두산(5리)→피반령(5리)→회인(15리)→보은(30리)→황간(30리)→추풍령(20리)이다. 이 교통로는 서울에서 천안과 청주를 거쳐 추풍령에 이르는 지름길에서 벗어나 있지만 상주(尙州)로 가는 중요한 통행로였다. 보은에는 큰 역(驛)이 두 군데 설치되었다. 함림(含林)과 원암(元巖)이 그곳이다. 함림역은 읍에서 북쪽으로 7리 떨어져 있는데 큰말 2필, 타는말 2필, 짐싣는 말 5필을 길렀다. 이역을 유지하기 위해 역리(驛吏)가 30명, 역노(驛奴)가 40명이 정해졌다. 원암역은 읍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데 큰말 1필, 타는말 5필, 짐싣는말 5필을 갖춰서 필요에 대비했다. 이역의 역리가 15명, 역노는 15명이고 진천(鎭川)에서 황간(黃澗)에 이르는 17개 역참(驛站)을 관할하는 율봉찰방(栗峰察訪)에 소속되어 있었다.

보은은 10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사각면(思角面)‧속리면(俗離面)‧왕래면(旺來面)‧탄부면(炭釜面)‧마로면(馬老面)‧삼승면(三升面)‧서니면(西尼面)‧수한면(水汗面)‧내북면(內北面)‧외북면(外北面)이다. 각 면에는 상급 지배신분층을 이루고 있는 양반들이 동성동본 마을을 이루고 세거하였다. 큰 성씨는 북실의 경주김씨(慶州金氏), 관터의 능성구씨(綾城具氏), 원암의 은진송씨(恩津宋氏), 고승의 풍천임씨(豊川任氏), 임한의 기계유씨(杞溪兪氏), 서느실의 화순최씨(和順崔氏), 둔덕의 창원황씨(昌原黃氏) 등이다.

회인은 동면(東面)‧서면(西面)‧남면(南面)‧북면(北面)‧강외면(江外面)‧읍내면(邑內面)의 6개면으로 구성되었다. 경작지가 얼마되지 않고 인구도 적은 회인의 양반 성씨는 다른 군현에 비해 큰 위세가 없었다. 애곡의 단양우씨(丹陽禹氏), 금곡의 남원양씨(南原梁氏), 눌곡의 영해박씨(寧海朴氏)가 세거하던 큰 성씨였다.

소작도 하지 못해 토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은 다른 생계 방도로 나무꾼으로 전락하여 나무를 해서 파는 것 밖에 마땅한 것이 없었다. 양반층들은 자연을 훼손한다고 하여 읍 주변 24리 안에서 벌채를 금지하자 자연히 불만이 쌓여갔다.

따라서 1862년 진주민란(晋州民亂) 이후 삼남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날 때 회인에서는 이에 자극을 받아 나무꾼들이 항쟁을 벌이게 된다. 1862년 5월 14일 회인에서 봉기한 나무꾼들은 떼를 지어 읍내를 향하면서 지나가는 마을마다 양반들의 집에 불을 질렀고, 읍내에 들어와서도 양반지주들과 향리들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질러 보복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동헌에 밀려들어가 현감 서호순을 위협하였다. 현감은 그 기세에 눌려 난민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하였으나, 읍내서 물러나 온 이들은 바로 해산하지 않았다. 외면에 나가 평소에 혹독한 지주경영으로 인해 인심을 잃었던 양반 지주가를 찾아다니며 불을 지르면서 보복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당시 농민생활을 궁핍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수령과 서리층의 탐학 행위도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있었던 암행어사의 보고에 의하면, 보은 군수 윤정효는 1857년 사징전(査徵錢) 1,120양을 중간에서 착복하였고, 1861년에는 재해를 입어 면세된 땅 중 31結을 농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대로 세금을 받아 착복하였다. 이런 비리의 실상은 온갖 방면에 걸쳐있으며, 힘없는 농민뿐만 아니라 부유층을 집중 수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이 집권한 초기에는 일련의 혁신정치가 이루어졌다. 중앙에서는 세도정치의 중심인 안동김씨를 배척하고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 조치를 강구했으며, 지방에서는 세도정치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부패한 관리를 내몰았으며 지방 토호의 무단 행위를 금지하였다. 조세제도를 고쳐 평민에게만 부과되던 군포를 호포라고 해서 양반에게도 바치게 하였다. 그 결과 어느 정도 민심이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10년만에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본래 대원군은 정치 기반이 취약한 위에 서원을 철폐한 이유 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맹렬한 반대를 받았고 무리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서민층에 토대를 둔 지지세력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새로 등장한 민씨정권(閔氏政權)은 국내외 양면에서 전개되던 심각한 국면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충분한 대책도 없이 외국 여러 나라와 근대 무역을 허용하는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76년 일본과 조약을 맺은 후 구미 제국주의 열강과 잇달아 국교를 확대하자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고 값싼 외국 상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보은과 회인은 무역을 하던 인천, 원산 등의 항구와 멀리 떨어진 내륙에 자리잡아 직접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구지역에서 많은 쌀을 사서 가져가는 까닭에 쌀값을 기준으로 하는 물가가 크게 오르는 현상은 다르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가뭄과 홍수 그리고 태풍, 그 위에 돌림병과 병충해가 끊임없이 닥쳐왔다. 19세기 전 기간 동안 3년에 1년 정도가 흉년이었으며, 2~3년 이상 계속되는 흉년에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삼남 각 지역의 수많은 군현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은과 회인의 향촌민들은 모순이 누적된 조선 말기의 사회구조 속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부패한 정치가 지방에서 드러나는 현상인 조세 수탈이 자행되고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빈부차이로 인해 갈등이 심각하게 야기되었다. 국교확대 뒤에느 값싼 상품과 근대 무기로 장비된 군사력을 앞세운 노골적인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청(淸)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침략 사실들은 그때그때 국내에 전해져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민족종교인 동학(東學)이 교세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특히 충청도 지역은 전라도와 경기도 등으로 급속히 확장되는 중심지로 역할하였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이르는 커다란 흐름이 충청도를 하나의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것이다.

동학(東學)의 창도(創道)와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동학의 창도

동학은 1860년 4월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가 경상도 경주 땅에서 창도한 종교이다. 새로운 민족종교인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국가가 처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그대로 투영되었다. 동학교리에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고, 전통 주문과 부적 등 민간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회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시대 이념이 들어가 있고, 외세에 대한 단호한 배격주장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쉽게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혁신 지식인을 통하여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다.

최제우는 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지 자신이 몰락한 양반가의 일원으로서 19세기 조선의 혼란한 사회 현실을 직접 겪은 인물이었다. 동학의 경전인《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에는 교조 최제우의 현실과 인식과 난국의 극복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즉 모순에 찬 사회현실과 거세지는 외세 침략의 위기를 자각하고, 신비한 종교 체험을 통해 제세(濟世)와 구국(救國)을 위한 우리의 새 민족종교를 창도한 것이었다.

경전에서 파악하는 사회인식은 명확하다. 당시는 왕조의 시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였다. 조선사회 체제의 근본 바탕인 신분제는 여기서 부정될 수밖에 없었고, 그 부정논리는 신분제의 차별대우로 인해 고통받던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어 갔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의 생각을 고치고,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풍습을 만들며, 노비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러한 사회를 많은 농민들이 동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조선국가의 지배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집권세력은 외세에 대한 배격문제에는 시각이 같았지만 신분제를 부정하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동학이 커지면 왕조정부에 정면 대항할 수 있다는 종교단체로 위기의식을 느껴 1864년 봄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교조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교조가 처형된 뒤 동학은 사교로 간주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관헌에 붙잡혀서 처벌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용담에 모이던 교도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동학교세의 확대

동학은 제2세대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활동에 의하여 다시 교세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최시형은 태백산으로 피신하여 화를 모면한 뒤 소백산맥 양편지역의 험준한 산골 마을을 거점으로 여러 군현을 전전하며 은밀히 포교해 나갔다.

이 시기에 동학이 퍼져나간 지역은 강원도‧충청도‧경상도의 울진‧정선‧영월‧보은‧괴산‧단양‧충주‧상주‧김산‧문경‧예천‧안동‧순흥 등지였다. 모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골짜기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서 유사시 험한 산길을 통해 피신하기 적합한 지역이었다.

동학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이래 구미 열강과 국교를 확대한 이후 더욱 교세를 확대시켜 나가게 된다. 영국과 조약을 맺은 뒤 기독교의 포교가 허용되고 외세의 침투가 본격화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동학은 더욱 포교를 확대해 나간 것이다.

1880년대에는 북접 교단의 주요 지도자가 되는 인물들이 입도하였다. 1883년에는 손병희‧손천민‧박인호‧황하일‧서장옥‧안교선‧여규덕‧김은경‧유경순‧김영식‧김상호‧안익명‧윤상호 등은 이후의 교단에서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호남에는 뒤에 남접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입도해왔다. 이들은 남영조‧김낙철‧김낙봉‧남계천‧손화중‧김덕명‧박치경‧김석윤‧호택규‧김개남‧조원집 등이다.

동학이 충청도 일대에 널리 퍼져서 교세가 커지는 중심지가 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교주 최시형의 포교 거점이 소백산맥 줄기와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충청도 여러 군현으로 쉽게 교세가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 그 하나의 배경이 된다. 또한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진취적인 인사들이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들어야 하겠다.

교조의 신원운동

1890년대 들어와 교세는 종전과 달리 삼남 일대에 널리 확장되고 동학교도들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동학을 사교로 간주하는 지방관아의 탄압은 계속되고 심해져서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동학교세가 증대되자 더 이상 사료로서 박해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내부에서 대두하였다. 왕조정부에 요구하여 포교의 공인은 먼저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최재우의 죄명을 씻어주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하였다. 교조의 원한이 풀려지면 자연히 동학을 사교로 간주하는 금지조치가 해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몇 차례 일어나게 된다. 본격적인 신원운동은 1890년대에 들어서서 시작되었다. 국교확대 후 10년에 걸친 사회변동은 농민 생활의 몰락을 가속화시켰고 외세에 대한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라한 사회분위기는 동학이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데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1891년 충청감사 조병식이 부임한 뒤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정도가 심해져 교단의 방침을 바꿔 교조신원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교단의 고위 간부들인 서병학과 서장옥이 1892년 7월 교주 최시형을 은신처로 찾아가서 교단 차원에서 신원운동을 역설하고 교주의 허락을 받지 않은채 공주에 동학교도들을 모이게 하여,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교조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금지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사태가 이같은 방향으로 진전되자 최시형도 동학 각 조직에게 전라도 삼례로 집결하도록 통유문을 보내게 되었다. 이 해 11월 삼례에는 수천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강경한 내용의 호소문을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하였다. 각 군현의 지방관이 동학교도들을 지목하여 체포하고 돈과 재물을 탈취하며 사상자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에 가세하여 양반들이 가혹한 탄압을 하고 있으니 이를 금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창도이래 처음 시도된 대규모 집회로서 지방 관헌에게는 적지 않은 압력이 되었다. 전라감사는의 회답은 “동학은 조정에서 금하는 바라. 인간의 본성을 이미 갖추었으며 어찌 정학을 버리고 이단에 나아가 스스로 죄를 짓는뇨. 반드시 미혹하지 말라”하였다. 그러자 물러나지 않고 계속 압력을 가하면서 호소문을 다시 제출하였다. 전라감사는 그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관하 각 군현에 공문을 보내게 되는데 내용은 동학에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타일러서 정학 즉 유교의 공부에 힘쓰게 해야 하지만, 박해는 금지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교조신원운동은 지방 관헌을 대상으로 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왕조정부에서 금지하기 때문에 감사로서는 그 조치를 따를 수밖에 없고 신원에 관한 권한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활동 방향은 분명해져 서울로 올라가 국왕에게 호소하는 방법뿐이었다. 동학교도들의 복합상소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추진되었다.

1893년의 보은집회와 그 전개과정

1893년의 보은집회와 왜양(倭洋)의 배척

전라감사의 침학 금지 공문이 관하 각 군현에 내려간 후 삼례 집회에 모였던 동학교도들은 해산하였다. 그렇지만 침학 금지는 말뿐이었고 동학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교단에서는 왕조정부에 교조의 신원을 호소해서 포교를 공인받아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히게 되었다. 이에 1893년 정월 보은군 속리면 장안마을(장내리)에 대도소를 정하여 교단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보은의 장안마을은 이 때부터 각처의 교인들에게 동학교단의 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은 집회를 전후한 시기부터 동학의 움직임은 단순한 교조신원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공주와 삼례집회의 직접 원인이 된 지방관의 수탈 문제에 덧붙여 외세의 침투로 야기된 민족의 위기를 자각, 대응하는 활동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미 한달 전 서울에서 복합상소를 할 때부터 격문 등의 방법을 통해 반외세 행동은 나타난 바 있었다.

보은 집회의 일차 통유문(3월 11일자)은 교조 신원과 사회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차로 나온 통유문(3월 16일자)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에 내세웠다. 이 통유문은 전국의 동학 조직에 일제히 집결하라는 지시를 전하면서 보은집회의 성격을 밝힌 것이다. 조신원운동은 이렇게 하여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앞세우는 사회운동으로 변하여갔다. 즉 종교운동으로 시작했지만 개혁과 외세 배척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한 단계 발전해간 것이다.

교조의 제사를 위해 동학 지도부가 청산 갯마을(浦田)에 모인 때인 3월 10일, 교주 최시형은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많은 동학도인들을 한 지역에 모이도록 하여 정부에 압력을 넣어야겠다는 것이다. 집회장소는 보은의 장안마을로 정했다. 장안은 교주가 오랫동안 주재하여 동학본부로 정해진 곳이었고, 각처의 도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서 잘알려진 장소였다. 그리고 이미 훨씬 전부터 많은 수의 교도들이 이 장소에 모여 있었다. 관헌의 지목과 추적에 쫓긴 동학교도들은 자연히 함께 모여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도생의 방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때 최시형과 더불어 한 자리에 모였던 중요 지도자들은 손병희(孫秉熙)‧김연국(金演局)‧이관영(李觀永)‧권재조(權在朝)‧권병덕(權秉德)‧임정준(任貞準)‧이원팔(李元八) 등이다. 이들은 청주‧보은‧청산‧옥천‧상주 등지의 동학지도자들로서 즉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최시형이 보은의 장안마을에 도착한 날은 청산에서 교조 제례를 마친 다음날인 음력 3월 11일이었다. 일단 집결 지시가 떨어지자 동학교도들은 이미 집결한 사람들과 합세하여 말 그대로 「바람에 흔들리고 구름과 안개가 메워지듯이」아니 밀물이 밀려오듯이 장안에 모여 들었다. 매일 각처에서 각각 수백명 단위로 몰려와서 불과 몇칠만에 수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동학교도들은 전라도의 금구 원평에 모여들었다. 원평집회가 동시에 열린 이유는 첫째 한 지역에서 일시에 많은 사람이 멀리 떨어진 보은까지 가서 참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하나이다. 봄철 농사 준비가 바쁜 이 시기에 여러 날이 걸리는 외지 출타가 경제면이나 시간상 어려웠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는 보은교단의 지도부와 성향이 다른 적극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회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물론 이 당시에는 교단의 지도부가 위치한 장안 집회의 중요성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각처의 핵심간부들은 장안마을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교주와 함께 주요 방침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보은집회의 전개과정

3월 11일 보은 관아의 삼문 밖에 붙인 격문 내용은 종교문제를 떠나 왜양(倭洋)과 맞서려는 자세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단순한 교조신원이 아닌 보국안민과 척양척왜 구호는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크게 해칠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장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이 같은 통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뭉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협상하였던 것이다.

보은집회는 지방관아에서 볼 때 전무후무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즉각 보은군수는 왕조정부에 보고하여 그 실상을 알렸다. 그리고 향리의 우두머리를 시켜서 동학 지도자를 만나보게 하고 또 자신도 직접 달려가서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였다. 그 같은 관변측이 대처한 과정과 탐지한 내용은 〈취어(聚語)〉에 상세히 조사되어 있다.

장안마을에는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이 집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대단히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었다. 이 기와집은 지금은 터만 남아 마을 뒤쪽의 논으로 변했는데 그 당시 독실한 교도가 살았던 집으로 보인다.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돌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 흩어져서 잤다.

“산아래 평지에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는 일 백여 걸음이고 넓이도 일 백여 걸음이며, 높이는 반장(半丈) 정도로 사방에 출입문을 내었다.” 이 기록은 돌성의 규모를 보여준다. 이 때 쌓은 돌성의 흔적이 지금도 논둑을 이루고 있어 그 형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성을 쌓을 때 필요한 자갈은 바로 옆으로 흐르는 삼가천에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따라서 많은 수의 동학교도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짧은 시간 안에 적지 않은 규모를 갖춘 돌성을 만들 수 있었다.

돌성과 도소 사이의 거리는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도소와 돌성 안을 부지런히 오가는 교도들이 서로 만나면 읍을 하고 양보하였으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모습에 엄숙하고 신중한 모양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들은 공동생활을 하여 어슬렁거리는 것을 금지했다. 돌성 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우며 교인으로서의 수행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 의식은 각지에서 모인 교도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모인 동학교도들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나 일인 당 돈 1푼씩 걷었는데 모두 2백 3십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천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먹을 양식은 각기 직접 몇일분을 가지고 왔고, 또 식량 조달을 책임진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단에서 대량으로 준비했던 것 같다.

3월 20일 최시형은 포(包)의 이름을 정하고 대접주를 임명했다 대규모의 집단 활동을 위해서 포 단위의 조직을 제도화한 시도였다. 당시 정해진 포명과 대접주는 50명에 이르지만 정확한 내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3월 16일에 해산명령을 내리는 한편 다음날인 17일에는 호조참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임명하여 현지로 가서 해산시키도록 했다. 군수 이중익은 3월 22일 장안마을로 가서 해산을 종용했으나 동학도들은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왕조정부는 해산령을 내린 뒤인 3월 25일 동학도의 보은집회를 처리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열렸으며, 어윤중은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직명이 바뀌어 충청감영 영장 이승원(李承袁)과 군관 이주덕(李周德)을 거느리고 보은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군수 이중익도 대동하고 장안마을에 직접 가서 동학도들 중 학식있는 사람들과 만났다. 이들은 허연(許延)‧이중창(李重昌)‧서병학(徐丙鶴)‧이희인(李熙仁)‧송병조(宋秉照)‧조재하(趙在夏)‧이근풍(李根豊) 등이다. 양반신분의 소유자들로서 동학 교단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로서 밝혔다.

저희들은 선왕조의 덕화로 살아온 백성이며 천지지간에 무고한 창생(蒼生)이 옵니다. 수도(修道)하여 五倫과 三綱의 밝음을 알고 마음속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함이 있습니다. 왜놈과 오랑캐는 짐승 같은 줄은 비록 어린이라도 알고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중략) 그런데 왜양(倭洋)을 물리치려는 창의가 어찌 큰 죄가 되어 한편으로 체포하고 한편으로 소탕하려고 합니까?(중략) 감사의 병폐는 이미 심해져서 저 무고한 창생들로 하여금 모두 도탄에 들어가게 하니 목숨 귀하기는 같은데 어찌 이렇게 잔인합니까? 또 왜양(倭洋)이 우리 임금을 위협함이 극에 달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음으로 막는다는 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하략)

어윤중은 명을 받고 보은까지 내려오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동학의 교세와 도인들의 성향을 파악한 다음에 동학도들과의 대화에 나서고 있었다. 따라서 집회의 의도를 자세히 듣고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주장이 명백한 동학도들에게 위압보다는 설득을 통해 해산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 다음날인 3월 27일 어윤중이 고종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은 동학도를 만난 경위와 동학도들의 주장을 아래와 같이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다.

(상략) 그들의 본뜻은 다만 한 마음으로 척양척왜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는 것뿐인데 방백(方伯)과 장리(長吏)들이 비류(匪類)로 대하여 침탈하고 학대함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중략) 오직 바라는 것은 우리들의 실정을 조정에 알려서 적자로 인정한다는 임금님의 밝은 뜻을 얻도록 하는 것이며 그러하면 마땅히 물러가서 생업에 힘쓰겠다고 말했습니다.(하략)

정부는 3월 28일 어윤중의 장계 내용을 논의한 결과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장위영(壯衛營) 영장 홍계훈(洪啓薰)에게 병력 6백명을 이끌고 보은으로 내려가도록 명령했다. 동학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경병(京兵)은 기관포 3문까지 가지고 3월 30일 청주에 도착하였다. 4월 1일에는 청주 영장이 1백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보은 읍내에 도착했다.

동학 교단의 지도부는 정면 충돌하지 않으려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 최시형은 먼저 노약자들을 물러가게 하고 젊은 장정들만 남아서 정부의 조처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침 고종의 윤음을 전달받은 어윤중은 곧 청주진 영장 백남석(白南奭) 및 보은군수와 함께 장안마을로 가서 윤음을 읽어주고 퇴거하기를 명령하였다. 결국 동학교도들은 4월 2일부터 장안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20일 간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지쳐 있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하였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 방면을 향해 떠났다.

이처럼 한국 역사의 중심에 떠올랐던 보은 지역은 동학 제2세교주 최시형이 중시하여 도소(都所)르 둔 곳이었고 교통이 편하여 삼남의 교도들이 오가기 쉬웠던 까닭에 1894녀 또다시 동학의 본부 역할을 하게 된대. 교주 및 고위 간부들이 청산 갯밭과 보은 장안을 오가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락하고 활동을 해나갔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보은상황과 북실전투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보은의 상황

1893년 봄 보은군의 장안 마을에서 열린 동학 집회가 해산된 뒤에도 구조적인 사회 모순 속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탐욕스런 수탈행위는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군현에서 농민들이 체제에 저항하는 항쟁이 속속 일어났다.

삼남 일대의 동학 교세는 갈수록 확대되었고 1894년(고종31년)에 지배층에 대한 농민들의 전면 항쟁이 촉발되었다. 그 계기는 전라도 고부군의 농민항쟁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분격한 농민들은 전봉준(全琫準)의 지휘 아래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무기를 빼앗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원성이 많았던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안핵사 이용태(李容泰)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농민항쟁의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씌워서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전봉준은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化中)‧김덕명(金德明)과 함께 각처에 창의문(倡義文)을 돌려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직후부터 전라도일대 수천의 농민들이 합세해 와서 곧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처음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한 뒤 백산을 점거하여 기세를 올렸고, 전라 감영에서 파견한 영군도 황토현에서 격파했다. 정부에서 경군(京軍)의 정예부대를 급파하여 진압하도록 하자 동학농민군은 남하하여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으로 진군했다. 1만여명으로 늘어난 군세로 장성에서 경군과 싸워 패배시키고 곧장 북상하여 전주를 점령하였다.

이같은 소식은 경상도‧충청도 등지로 퍼져나갔다. 지하에서 숨어서 포교하던 동학 조직들은 표면에 나와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거침없이 동학에 입도해 교세가 날로 확대되었다.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전라도 농민군의 첫 봉기와 때를 같이 하여 무장 봉기에 나섰다. 사회개혁의 이념이 서로 통하여 전봉준과 밀접히 지냈던 혁신지식인 서장옥(徐章玉)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충청도 지역은 봉기에 반대하던 교단의 지침에 의해 확산되지 못했다.

무장한 농민군이 읍내로 들어가 점거하고 관아를 장악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방관아에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마을도 반상(班常)의 상하 관계 질서가 무너져갔다. 양반들은 힘을 잃고 토호 행위로 인심을 얻지 못한 사람은 앙갚음 당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향리들 가운데 수탈이 지나쳤던 사람을 해를 입었다.

교주 최시형은 1894년 정월 청산의 문암(文岩)마을에서 전봉준이 동학조직을 동원하여 무장 봉기하고 고부군을 격파했다는 급보를 전해 듣고 무장봉기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너무 급하게 서둘지 말고 뒷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관리들에게 탄압을 받아온 교도들은 동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서 실현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6월 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지게 되자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더욱 거세졌다. 전라도 지역은 물론 충청도 일대에서도 일본과 전쟁을 벌이려는 농민군의 준비작업이 전개되었다. 친일파 관료들이 정권을 쥐고 갑오경장을 추진하는 소식은 농민군의 활동을 격화시켰다.

하지만 교주 최시형은 교세의 확대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칫하면 호된 탄압이 우려되어 전라도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동학 농민군을 거듭 질책하였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도인들에게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전라도 농민군은 이같은 교주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기에 이르러 남접(南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충청도 대부분의 군현에는 교단의 방침을 지키려는 대접주들이 조직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말단 접 조직의 성향은 전라도의 활동을 추종하는 예가 많았다. 또 그렇지 않아도 동학을 금지하는 관리들은 남북접을 구별하지 않고 탄압을 시도했다. 그래서 점차 충청도의 상황은 전라도를 닮아 마침내 여름에서 가을에 걸치는 기간에 충청도의 여러 군현은 읍내만 제외하고 동학 조직이 향촌지배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교단은 지나치게 극렬한 행동은 금지했으나 사회개혁은 대세의 흐름으로 간주하고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학의 포접(抱接) 조직이 장악하고 있는 군현을 순회해서 개혁 작업의 조정을 맡도록 간부들을 파견했다. 감찰관과 안렴사로 불렸던 이들은 가는 곳마다 농민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송사의 처결을 의뢰할 만큼 신임을 얻었다.

전라도 남접농민군은 9월에 들어 총대장 전봉준의 결정에 따라 다시 무장 봉기하였다. 이에 교단 내부에서도 나라의 위기에 직면하여 일본과 싸우자는 의견이 우세하여 교주 최시형은 청산에 불러모은 각포 두령들의 의견을 좇아서 9월 18일 기포를 결정했다. 이 기포령에 호응하여 충청도 각 군현의 동학 조직들은 무장하여 보은에 집결했다. 단양과 충주방면에서 남하하는 동학 농민군들은 속속 커다란 세력을 이루어 합세했다.

보은 장안 마을에는 도소가 있는 주변 일대에 4백개의 초막(草幕)을 만들었다. 옥녀봉 아래의 대추나무 밭 사이에 나무가지로 뼈대르 엮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만든 초막의 대열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수만의 이르는 대군이 장안 일대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어 황간과 영동지역의 여러 마을에 나누어 장기적인 주둔에 대비하였다.

최시형은 북접 농민군의 지휘권을 통령(統領) 손병희(孫秉熙)에게 맡겨서 전라도의 농민군과 합세하도록 했다. 북접군은 오색기로써 각 포를 분간하게 하였다. 영동과 황간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북접 농민군이 논산으로 출진한 것은 10월 23일경이다. 이 날부터 옥천을 거쳐 서쪽으로 행군하는 농민군 병력이 줄을 이었다.

논산에서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과 10월 말에 합류한 손병희 휘하의 북접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 나섰다. 11월초에 벌어진 우금치 공방전은 치열하였다.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둣 높았으나 전투는 병력의 수와 사기만으로 치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의 무기는 열악했고, 일본군은 근대무기로 무장한 정예병이였다. 산 정상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올라오는 농민군을 향해 쏘아댔다. 이렇게 수십차례를 거듭하다가 결국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은과 영동‧황간을 비롯한 충청도 남부 일대의 상황은 농민군의 주력이 빠져나간 뒤에 역전되었다.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이 차례로 순회하면서 동학 도소를 비롯한 근거지를 파괴하고, 남아있는 동학의 지도자들을 붙잡아 처형했으며, 교주 최시형을 지목해서 체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동학 조직은 궤멸되었다.

북접 농민군의 최후와 북실전투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남북접 연합 농민군은 남부 지역으로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