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료집

보은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곳

장안면

외속리면(外俗里面)

1. 위치

면적 29.85ha, 650가구 1,897명(1999년말), 본군의 동부에 위치하며, 동북은 경북(慶北) 상주시(尙州市)와 내속리면(內俗離面), 남은 마로면(馬老面), 탄부면(炭富面), 서는 보은읍(報恩邑)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의 지역으로서 속리산 밑이 디므로 속리면이라 하여 19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47년 2월 7일 충청북도령 제36호 행정구역 분구에 의하여 속리면을 갈라서 바깥이 되므로 외속리면이라 하여 서원, 불목, 봉비, 하개, 장내, 황곡, 오창, 장재의 8개 리와 탄부면 구인리를 편입하여 도합 9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3. 자연

장재리와 서원리 일대는 300m 이상의 산지가 계속되며, 보청천의 상류인 삼가천이 중앙을 관통하고 오창리, 구인리, 하개리와 산간 마을인 불목리에는 동남 방향으로협장하게 충적지(沖積地)가 발달하여 망상기류(網狀氣流)가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다.


4. 산업

본면에서는 감, 밤, 담배의 재배가 성하였고, 최근에는 고등 채소 재배로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장재 저수지를 이용하여 쌀 생산도 자급할 수 있게 되었다.


5. 교육・문화

면 소재지는 장내리이며 초등 1개교가 있다. 그리고 명종 4년(1549)에 서원을 창설하여 충암 김정(金淨), 대곡 성운(成運), 동주 성제원(成悌元)을 봉안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사액(賜額)되었으며, 그후 중봉 조헌(趙憲),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봉안한 고적 상현서원(象賢書院)이 서원리에 있다.

구인리(求仁里)

1. 위치

면적 1.6㎢, 90가구 275명(1999년말). 본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書院里), 서북쪽은 장재리(壯才里), 남은 황곡리(荒谷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사각면(思角面)의 지역으로 서낭나무와 다리가 있으므로 귀신다리라 하였는데 보은 원님의 처가가 이곳에 있어서 원님이 항상 찾아오므로 귀인다리(歸仁橋) 또는 求仁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목, 방아다리, 쇄실을 병합하여 구인리라 해서 탄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구인(귀신다리, 귀인다리) : 옛날 귀신교(鬼神橋) 또는 지렁이 들()이라고부르던 곳이다.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이성만(李成晩), 은만(殷晩)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당시 보은 현감으로 있던 이번(李蕃)이 영의정으로 있던 그의 아우 이여(李畬)와 함께 이 마을에 들려 두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하고 마을이름이 귀신다리가 아름담지 못하다고 하여 영의정 이여(李畬)가 “효제(孝悌)는 어진 것이 근본이다”라고 말하며, 마을 이름을 구인교(求仁橋)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행정구역 개편시 구인리라고 하였다.
  • 대목이 : 방아다리 서쪽에 있는 마을. 예부터 큰 나무가 많았다고 함.
  • 방아다리 : 구인 서북쪽에 있는 마을 뒷산등성이가 마치 방아다리처럼 생겼다 하며, 작은 도랑을 건너가는데 디딜방아를 걸처 놓고 다녔기 때문에 방아다리라고도 함.
  • 쇄실(松谷) : 귀인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 예안(禮安) 이씨(李氏) 재실이 있는 곳으로 재실이 변한 말로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 하여 송곡(松谷)이라고도 한다.

4. 기타지명

  • 마비(馬碑) : 마배라고도 하며, 암소바우 동쪽에있는 들. 하마비가 있음.
  • 쇄실고개 : 쇄실에서 귀인다리로 넘어가는 고개.
  • 오리샘 : 오리샘 자리에 있는 샘. 이곳에서 전에 오리를 길렀다고 한다.
  • 작은골 : 큰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조파미 : 귀인다리 남쪽에 있는 들로서 조,기낭 등 밭 곡식이 잘 되는 곳으로 조 이삭이 파도치는 물결 같다하여 붙인 이름.
  • 주봉(珠峰) : 쇄실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가 구슬같이 생겼다고 함.
  • 큰골 : 쇄실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5. 문화유적

  • 영창재(永昌齋)
    구인리에 있는 예안 이씨 중종 소유의 재실. 1693년(숙종 19)에 예안 이씨 종증의 재실로 건립하였다가 1917년 소실되었던 것을 1922년 다시 중건하였다.
  • 이항묘비(李沆墓碑)
    조선 연산군 때 은사(隱士) 예안인(禮安人) 이항의 묘비다. 비문은 이조정랑(吏曹正郞) 구수복(具壽福)이 짓고 그의 사촌동생인 성균생원(成均生員) 지(漬)가 썼다.
  • 이협묘비(李莢墓碑)
    조선 숙종때 예안인 이협의 묘비로 비문은 조병즙(趙秉楫)이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조선조 고종때 세움.
  • 항일 투사
    1919년 기미 독립만세 때, 보은 고장에서는 10 의사가 있었다. 구인리에서는 이창선, 이준영, 이인하 길상리의 김용석 의사들이 길상리 뒷산 삼봉산정(三峯山)에서 음력 4월 13일밤 자정을 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친 사건이 ‘기미독립만세운동’이었다.

6. 기타

  • 구인팔경(구인팔경)
    (1) 오봉귀운(五峯歸雲) : 오봉산에 모여드는 구름
    (2) 구병명월(九屛明月) : 구병산 위에 떠 있는 밝은 달.
    (3) 행단청풍(杏亶淸風) : 행단에서 부는 맑은 바람.
    (4) 유수모연(柳藪暮煙) : 버드나무 숲속에 드리운 저녁연기
    (5) 옥령단풍(玉領丹楓) : 옥녀봉의 단풍
    (6) 선암백설(仙岩白雪) : 선암바위의 흰 눈
    (7) 조평춘수(鳥坪春樹) : 조평들에 서 있는 봄철의 나무
    (8) 부천야우(鳧泉夜雨) : 오리샘에 나리는 밤비

봉비리(鳳飛里)

1. 위치

면적 3.58㎢, 101가구 314명(1999년말). 본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불목리(佛目里), 서는 하개리(下開里), 남은 탄부면(炭釜面) 북은 서원리(書院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새비랭이 또는 봉비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비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새비랭이(沙飛龍) : 봉비리의 중심 마을로 옛날 구병산에 나무가 무성하고 들에는 잡초가 우거져 철새들이 모여 들었는데 오림미(梧林)숲에는 봉황 한쌍이 살고 있어 아침이면 날아 황곡빈경산에서 놀고 밤이면 오리미 숲으로 날아왔다고 해서 사비랭이 라고 했다고 함. 또한 마을 뒤, 꼴미산(花山)이 봉황이 나는 형상이라 하여 새비랭이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새들이 날아가 버리면 마을에 흉사가 생긴다고 하여 봉황이 깃들 수 있는 오림(梧林)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 오리미(梧林) : 오동나무 숲이 있었고, 꼴미산(花山)에는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봉비가 되고, 봉황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도록 오동나무를 심고하여 오리미라고도 함.

4. 기타지명

  • 갈기골 : 새비랭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갱변 : 냇가에 있는 논으로 전에는 마을이었으나 79년 농지정리로 논으로 변함.
  • 곰동골 : 보도골 바탕 밑에 있는 골짜기.
  • 구병산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 봉우리가 아홉 개로 절경이며, 속리산과 연계하여 “충북알프스산”으로 개발되어 가고 있음. 남쪽 산허리에는 “보은 위성중계소”가 있음.
  • 굴골 : 새바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골이 있음.
  • 까치실고개 : 새비랭이에서 불목리로 넘어가는 고개. 일명‘도마티’라고도 하며, 옛날 부자들이 말을 타고 이 고개를 넘으면, 유난히 까치들이 많이 날았다는 전설.
  • 꼴미산(花山) : 새비랭이 뒤에 있는 산으로 산꽃들이 많았음.
  • 둥고개 : 새비랭이에서 하개리 개안으로 넘어가는 고개.
  • 모래봉(沙峰)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산으로 심방골 앞에 있음. 산 정상에는 묘가 있는데 떼가 살지 않는다고 함.
  • 보도골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물탕 밑에 있음.
  • 보도골 버덩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버덩으로 나무꾼 들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함.
  • 불당골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골에서 등성이를 넘어 옛날에는 절이 있었는데 하도 빈대가 많아 스님이 떠나자 폐사되었다고 함.
  • 불당골 굴 : 불당골 안쪽에 있는 구리 방만하다고 함.
  • 사양골 : 새비랭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서낭골이 변한 것으로, 옛날 짐승을 잡던 사냥터가 있음.
  • 산제당 : 승지골에 있는 산제당으로 정월 보름날 산제를 올림.
  • 서너실 고개 : 새비랭이에서 불목리 불목이로 넘어가는 고개로 작은 고개가 서너 개 있다 하여 ‘서너실고개’가 됨.
  • 승지골 : 하평산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서낭당이 있어 제사를 지냈다고 함.
  • 신바위 : 사양골 중간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서 사냥을 하기 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함.
  • 심방골 : 새비랭이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골 밑에 있으며, 지형이 깊고 방처럼 아늑하다고 함.
  • 약물탕 음달사 : 새비랭이 동쪽 구병산 정상 밑에 있는 산봉우리. 정상에 큰 바위굴이 있는데 굴 속에서 약물이 나온다고 함.
  • 작은문바위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고개로 서원리 안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문처럼 생겼음.
  • 장사평 : 진사래 들을 말함. 사래는 이랑의 고어임
  • 절골 : 새비랭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구병산으로 이어진다.
  • 진사래 보 : 하개리와 봉비리 앞들에 있는 보.

5. 기타

  • 봉비리의 8경
    1. 오림명월 : 봉황은 오동나무 숲에만 앉는다고 하는 우거진 숲
    2. 쌍용반송 : 소나무 형상이 마치 두 용이 서린 것과 같은 소나무
    3. 화산향풍 :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산에 향기로운 바람이 분다.
    4. 비봉기소 : 각종 새들이 날아서 저들의 둥지로 찾아든다.
    5. 진사래보 : 하개리와 봉비리 앞들에 있는 보.
    6. 구병기운 : 아름다운 구병산의 구름이 서리어 있고.
    7. 빈경낙조 : 빈경산에서 봉황이 저녁 노을에 놀고.
    8. 금개조어 : 앞 시냇물에서는 태공들이 고기를 낚고 있는 마을이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정경이 있는 마을을 읊음.

6. 전설

조선 정조 때의 일이다. 외속리면 봉비리에 정가묵(鄭可黙)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으나, 벼슬 길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독서와 산책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마을 앞 수 만평에 이르는 토지가 황무지가 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되었으나, 부근의 전답들도 ‘달밤에도 가뭄이 탄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수리시설이 없었다. 이외로 남다른 생각이 있어 ‘삼가천 냇물’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할 것을 결심하였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발원하여 금강에 흘러가는 삼가천은 오늘날 내속리면 삼가리에 큰 저수지를 막아 유수한 수리시설을 갖춘 냇물이었지만 옛날에는 외속리면 하개리에 이르면 냇물은 모두 자갈속에 스며들어 장마 때가 아니면 좀처럼 물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을 안 정진사는 약 십리 가량 위로 올라가 외속리면 서원리 북두무니라는 냇물 웅덩이에서부터 냇물 바닥을 파서 하류로 물길을 잡아오기 시작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었지만 하인들과 동민들을 모두 설득하여 새로운 물길을 찾아 하류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하개리 마을 아래로 돌로 제방을 쌓고 보를 막았다. 엄청난 양의 물이 고였고 이 물을 이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선각자라 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칭송이 자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 이름을 ‘진사보’라고 부르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지어 살게 되었다. 사투리로 ‘진사래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불목리(佛目里)

1. 위치

면적 1.84㎢, 25가구 94명(1999년말).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남은 마로면(馬老面) 서・북은 봉비리(鳳飛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불모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불목리라 하였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불목골(불모골, 火目) : 정감록 비결파들의 지은 이름으로, 마로면 시루산에 떡시루를 걸어놓고 방화실에서 불을 붙여 불이 잘타는가를 불목리에서 들여다 보는 형국이라 하여 불목(火目)골이라 불러오다 행정구역 개편시 불목(佛目)이라고 개칭함.

4. 기타지명

  • 까치실 고개 : 불모골에서봉비리 새비랭이로 넘어가는 고개.
  • 노루목산 : 불목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증골 위가 되며 바위끝이 노루목처럼 잘록하게 생겼음.
  • 문바우 : 지방안 입구에 있는 바위로 골짜기에 들어가는 길옆에 있어서 문바우라고 함.
  • 생골 : 불모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는 마을이었으나 철거 되었음.
  • 서느고개 : 불모골에서 새비랭이로 넘어가는 고개.
  • 솔밭고개 : 불모골 동쪽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들녘
  • 수구렁 : 불모골 남쪽에 있는 골, 논에 소나 사람들이 빠지는 곳이 많다고 함.
  • 시리미들 : 불목리 서남쪽에 있는 들.
  • 시집목골 : 불모골 북쪽 히미장대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
  • 잡은불목골 : 불목골 서북쪽으로 잔등너머에 있는 들녘
  • 재판골 : 시집목 골안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중골 : 불모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사기 그릇을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함.
  • 지방안 : 불모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구병산에서 마을 바로 뒤로 나있음.

서원리(書院里)

1. 위치

면적 9.63㎢, 73가구, 167명(1999년말) 본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북은 내속리면(內俗離面), 서는 구인리(求仁里), 남은 봉비리(鳳飛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상형서원(象賢書院)이 있었으므로 서원말 또는 서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돌리(岸乭里)를 병합하여 서원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안돌(安乭, 안돌이) : 서원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험하여 바위를 안고 돌게 되었음.
  • 황해동 : 안돌이 동남쪽에 있는 마을. 해가 질 때 황금같이 누런 햇빛이 비친다고 함.

4. 기타지명

  • 감투바우 : 갓 쓴 바우라고도 함. 모양이 갓을 쓴 것처럼 생김.
  • 광대바우 : 광대밭 골에 있는 바위로 형상이 광대가 노는 형상을 하고 있음.
  • 광대밭 골 : 서원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광대바위가 있음.
  • 단지술 : 서원 앞내에 있는 소. 단지처럼 생겼음.
  • 담싼골 : 산지당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지당골 옆이 되고전에는 담을 쌓았다고 함.
  • 도장골 : 황해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안방처럼 아늑하다고 함. 도장은 안방의 고어임.
  • 딸바위 : 안돌이 동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에 구멍이 있어 왼손으로 돌을 던져 들어가면 딸을 난다고 함.
  • 매바우 : 매바우골에 있는 바위로 매처럼 생겼음.
  • 매바우골 : 물탕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매바우가 있음.
  • 매바우 둠벙 : 매바우 밑에 있는 둠벙(소)
  • 맹가남 : 서원 북쪽에 있는 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맹가라는 중이 살았다고 함.
  • 먹뱅이 : 안돌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에도 절이 있었는데 이름이 ‘먹뱅이’였다고 함.
  • 무접뿌리 : 황해동 남쪽에 있는 산으로 산 중턱에 밭이 있었는데, 황토흙이 발에 붙으면 떨어지지 않고 주위 곡식 뿌리까지 들고있었다고함. 무접벌산=무접뿌리 산.
  • 문바우 : 담싼골 잔 등에 있는 바위. 문처럼 생겼음.
  • 물탕골 : 황해동 뒤에 있는 골짜기로 매바우 뒤가 되며 물탕이 있음. 물탕골이 변하여 뭉탕골이 됨.
  • 바람골 : 황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바람이 맑아서 ‘바람골’이라고 함.
  • 벼락바골 : 황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에 벼락바위가 있음.
  • 벼락바우 : 벼락바골에 있는 바위. 벼락을 맞아 깨졌음.
  • 북두문이(北斗淵) : 황해동 서쪽에 있는 연못으로 형상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되어 있음.
  • 비루고개 : 황해동에서 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 마루에는 큰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어 불리운 말.
  • 비루고개 둠벙 : 비루고개 밑에 있는 소. 벼랑 밑에 있음.
  • 산지당골 : 서원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제당이 있으며, 정월에 날을 받아 산제를 지낸다고 함.
  • 생여바우 : 안돌이 동쪽에 있는 바위로 상여처럼 생겼음.
  • 서원계곡 : 외속리면 서원리에서부터 내속리면 만수동에 이르는 13km 정도의 계곡으로 빼어난 경치와 오염되지 않은 물을 즐겨 찾는 곳이다.
  • 서원리 공동묘지 : 황해동 뒷산으로 묘지처럼 생긴 형상이며, 도유림으로 공동묘지이다.
  • 솟대나무 : 황해동 앞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삼백년이 넘어 보이고 있으며, 원님이 쉬었다 간 후 이곳에다 원님기를 세웠다고 한다.
  • 수살매기 : 서원 입구에 있는 길가에 ‘수살’이라는 샘이 있었으나 도로 확장시 매워지고 없음.
  • 신임이고개 : 황해동에서 내속리면 갈목으로 넘어가는 고개. 속리면 시절 면사무소가 서원에 있었고, 또한 지서는 상판에 있었기에 새로 부임하는 지서장이 면사무소를 거쳐 이 고개를 넘어 부임했다고 함.
  • 아들 바우 : 안돌리 동쪽에 있는 바위에 구멍이 있는데, 이곳에 돌을 던져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함.
  • 애랭이 : 안돌이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이 깊어 봄이면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는 골이라 하여 아지랑이골이라고도 함.
  • 치마바우 : 서원 남쪽에 있는 바위로치마를 두른 것처럼 생김.
  • 칠연성(七硯石) : 벼루와 같은 흔적이 있음.
  • 터전들 : 서원 동쪽에 있는 들. 서원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의 마을터였다고 함.
  • 품페이 : 서원 앞 냇물에 있는 소. 단지술 밑이 됨.
  • 허망골 : 안돌이 남쪽에 있는 험한 골짜기.
  • 희넘이재(홀어머니재, 回越峙) : 황해동에서 내속리면 갈목리 갈미기로 가는 고개. 이곳을 넘어가는 신혼 가마는 남편이 죽어 홀어미가 된다 하여 홀어머니재라고 하며, 그리하여 돌아서 간다고 해서 희너미재 회월티 라고 한다.

5. 문화유적

  • 상현서원(象賢書院)
    1549년(?? 4년) 보은현감 성제원(成悌元)이 이 고장 출신 기묘명현(己卯名賢) 김정(金淨)의 위패를 삼년산성내에 봉안하고 삼년성서원으로 창건하여 1610년(光海君 2년)에 사액을 받았다. 1672년(顯宗 1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대곡 성운(大谷 成運), 동주 성제원(東州 成悌元) 중봉 조헌(重峰 趙憲), 우암 송시열(尤庵 松時烈)등 4현(四賢)의 위패를 추향(追享)하였다.
    1871년(高宗 8년) 서원훼철령으로 폐원될 때 강당은 보은향교에 이건 오늘의 명륜당이 되었다. 그후 1892년(高宗 29년) 김세희(金世熙)등이 옛터에 단을 만든 후 1896년(高宗 33년) 김문희(金文熙)등이 삼칸 띠집을 재건하였으며 1949년에 어윤원(漁允元)등이 지금의 건물로 고쳐 세운 것을 1971년에 보수하였다. 지방문화재 제 48호
  • 서원리 소나무
    지상 50cm 위에서 두 가지로벌어진 원둥치에 속리산 입구에 서 있는 정이품 송과 같이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로 수령은 600년 이상으로 추측되며, 수세가 왕성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암소나무 또는 정부인(貞夫人)소나무라고도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소나무는 정이품 소나무와 내외 지간이고 그 나무가암나무이기 때문에 원가지가 두 개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천연기념물 35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오창리(悟倉里)

1. 위치

면적 1.97㎢, 71가구 235명(1999년말) 본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장재리(壯才里), 그리고 보은읍(報恩邑)에 둘러싸여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심리(梧心里), 사창리(士倉里), 오용리(五龍里)를 병합하여 오심과 사창의 이름을 따서 오창리(悟倉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새창이 마을 : 장자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세조께서 속리산에 가실 때 대궐터에서 야식을 하시는데 세조를 모시는 병정들이 이곳에 묵어서 세창이라하던 것이 새창이로 변했음.
  • 암소바우 : 장자불 남쪽에 있는 마을 모롱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암소 발자국과 같은 자국이 있다 함.
  • 오심불(悟心村) : 오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세조대왕께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속리산에서 나오고 있는 도중에 지금의 오창 1리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고 함.
  • 장자불(장자촌, 장자울) : 오심이 남쪽에 있는 현재는 오창 2리가 된다. 옛날 표씨가 독점마을에서 독을 구어 생활할 때, 표씨의 큰아들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함.

4. 기타지명

  • 구수고개 : 장자불에서 보은읍 길상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소의 구유같이 생겼다고 함. 새쟁이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수로 공사를 할 때, 없어졌음. 오창 2리에 있었으며 장자울 또한 장자불 독굽기 등으로 불리움.
  • 담안들논 : 대궐터 앞에 있는 들. 모두 논으로 되었음.
  • 동녘고개 : 오심이에서 대궐터로 넘어가는 고개로 장승고개 왼쪽이 됨.
  • 목고개 : 오심이에서 장자불로 넘어가는 고개. 장승고개 오른쪽으로 이여송 장군이 세 고개의 맥을 끊어 놓았다는 전설.
  • 미륵댕이 고개 : 보은읍 대야리에서 외속리면 오창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시작되는 곳에 통일탑(말티)휴게소가 있음.
  • 새창이 들 : 구인리와 오창 2리 사이로 새로 개간된 들임.
  • 수림이재 : 오창에서 보은으로 가는 고개로 나무가 울창했다.
  • 외뎅이골 : 윗증골에서 소실티 목골 사이에 매복되었던 병사들과 교전을 하게 됨. 당시 세조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 대궐터에 머물게 되자 단종을 옹호하던 병사들이 이곳에 매복하여 있다가 발각되어 세조는 장안으로 돌아 서원 뒷산인 희넘이재를 넘어 속리산으로 가게 되어 무사하였으나, 단종을 옹호하던 세력들은 이곳에서 교전하여 전멸되었다고 전하고 있음.
  • 장승배기 : 오심이에서 대궐터로 넘어가는 고개, 전에는 높았으나 도로 확장으로 낮아짐. 이여송이 산새가 하도 좋아서 인재가나올 것을 두려워하여 장승배기와 목고개, 동녘고개를 잘랐다고 함.
  • 저녁골 : 오심이 서쪽에 있는 긴 들, 세조께서 대궐터에 묵으실 때 이곳의 쌀로 저녁을 지어 드렸다고 함.

5. 문화유적

  • 이정 묘비(李晶 墓碑)
    조선 인조 때 은사(隱士) 예안인(禮安人), 송제 이정(李晶)의 묘비로 비문은 공조참판 윤창섭이 지었음. 마을 입구에 예안 이(李)씨 세거비가 있음.
  • 추원각(追遠閣)
    오창리에 있는 예안 이씨 종증 소유의 전면 2칸, 측면 1칸의 목조 와즙 비지정 문화재, 예안 이씨의 선대 5위를 춘추로 제사 지내기 위하여 송곡(松谷)에 비를 세웠다가 194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으로 2칸 중 1칸은 세종대왕 유서판(諭書板)을 걸었고, 1칸은 익양공(翼襄公) 이천(李薦)의 실기비(實記碑)를 세웠고 대로변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장내리(帳內里)

1. 위치

면적 3.74㎢, 138가구 381명(1999년말).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서원리(書院里), 봉비리(鳳飛里), 북서는 구인리(求仁里), 남쪽은 황곡리(荒谷里)에 위치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때, 마장(馬場) 안쪽이 되므로 장안 또는 장내(場內)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평리 사각면(思角面)의 구인리를 병합하여 장내리(帳內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새터마을 : 장터 북쪽에 새로 된 마을.
  • 장터마을 : 새터 남쪽에 있는 마을로 60년대까지도 장이 섰음.

4. 기타지명

  • 거무샘(墨石井) : 서봉 서쪽에 있는 샘. 아무리 가뭄 해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빛이 검푸르다 하여 검음샘이라 하던 것이 거무샘이 됨.
  • 사격장 : 작은 항가골과 큰 항가골 사이에 군 부대 사격장을 1984년 설치하였음.
  • 소재비골 : 장내 2리에 있는 골짜기로 일제시대 주민들이 굶주려서 소를 끌어다 잡아 먹었다하여 ‘소잡이골’이라 하던 것이 소재비골이 됨.
  • 승지골(聖地) : 서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선녀들이 신선바위 옥녀봉에 내려와서 덕행을 쌓았다 하여 성스런 곳이란 뜻으로 성지(聖地)라고 함.
  • 신선바우 : 장안 북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이곳에서 신선들이 놀았다고 함.
  • 옥녀봉(玉女峰) : 장안 서북쪽에 있는 산. 옥여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 함.
  • 작은 항기골 : 승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고, 함씨(咸氏)들이 살았다고 하여 함가골이라 하던 것이 항기골이 됨.
  • 큰항가골 : 작은 항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토골 : 서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최씨들이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토골 또는 최동(崔洞)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은 예비군 종합교육장이 되고 있음.

5. 문화유적

  • 동학대도소터(東學大都所址)와 취회지(聚會址)
    1893년 1월 옥녀봉 아래에 설치하였던 동학 본부였던 대도소(大都所)가 있었던 터다. 건물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1894년 10월 14일자에 기록된 도순무영(都巡撫營)의 우선봉(右先鋒) 이두황(李斗璜)의 기록에 의하면 “동리가 즐비하고 새로 지은 큰 집이 주산 아래 있는데 최법헌이 거처하던 곳이라(洞樣?比而新造一座大屋于主山之下比崔法軒之處所云)” 표현된 것으로 보아 매우 크게 지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도소가 있었던 장내리 29번지 동쪽이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2일까지 수만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길이와 너비가 각각 1백여 걸음이나 되고 높이가 어른의 허리쯤 되는 돌담을 쌓고 모두 그 안에서 농성하며 주문(呪文)을 외우고 “척왜・양창의(斥倭 洋倡義)”, “보국안민”과 “서정쇄신”을 주장한 동학교도 취회지(東學敎徒 聚會址)로 모인 당시 모인 교도의 숫자에 대하여는 “동학란기록”에는 2만여명 “일본외교문서”에는 2만 3천명, “광서조중일교섭사료”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앞에는 2만 7천여명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7만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상이하다. 현재는 모두 농경지로 변하였고 대도소 자리에서는 기와파편이 발견되고 취회지에는 당시 돌담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돌의 유구를 볼 수 있다.

장재리(壯才里)

1. 위치

면적 3.83㎢, 52가구 154명(1999년말). 본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동은 구인리(求仁里), 서는 오창리(悟倉里), 남은 황곡리(荒谷里), 북은 내속리면(內俗離面)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표장자(表長者)가 살았으므로 장자불, 또한 장자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재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단지바우 : 쌀개목 동쪽의 골짜기로 단지 모양을 하고 있는 마을이다.
  • 대궐터 : 장자불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장재저수지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세조대왕이 신병 치료차 속리산에 오다가 이곳에서 임시로 대궐을 짓고 머물렀다 하여 대궐터가 되었으며, 오늘날 취락구조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은 모두 한옥이 되어 한옥마을이라고도 한다.
  • 아랫말 : 독점 입구에 있는 마을.
  • 웃말 : 아랫말 위에 있는 마을
  • 작은 골 : 독점 북쪽에 있는 마을.
  • 장자동(長者洞) : -> 장재리
  • 장자불(壯才 壯者洞) : 표씨가 종쟁이들 집을 짓고 대궐터 동쪽 골짜기에서 독을 구워 생활 할 때 표씨(表氏) 큰 아들은 개울 건너에 살아 장자울 이라 함.

4. 기타지명

  • 된비얄 : 웃말 동쪽, 속날 위에 있는 비탈로 매우 가파른 비탈임.
  • 마당바우 : 한각골 너머에 있는 바위로 마당처럼 넓음.
  • 말티고개(말티재, 馬峙, 薄石峴, 馬峴礴石) : 장재리에서 내속리면 갈목리로 가는 고개로 옛날에 세조대왕이 말을 타고 지나갔다고 하여 박석티라고도 하는데, 세조대왕이 고개를 넘을 때, 돌을 깔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 밀밭골 : 바랑골 앞쪽 끝에 있는 골짜기.
  • 바람골 : 장재 저수지 안쪽에 있는 골짜기.
  • 바른골 : 독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에서 바로 보인다고 하여 바른골이라고 함.
  • 박석지 : 장재 저수지를 말함.
  • 버구리 산 : 대궐터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시루봉이라고도 하며, 바구리를 엎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어 바구리산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버구리산이 되었음.
  • 버구리산골 : 말티고개 올라가는 길목에서 오른쪽으로 있는 가장 높은 골짜기로 범이 굴러죽었다고 함. 범굴이 있음.
  • 봉래산 : 진서들과 쌀개봉 사이에 있는 산임.
  • 북바우 : 대궐터 건너편에 있는 바위, 세조가 대궐터에 행궁(행궁)을 짓고 묵을 때 앞산에 매단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고 전함.
  • 살개목 : 독점 동쪽에 있는 골짜기, 디딜방아의 쌀개처럼 생겼다고 함.
  • 샘건너 : 웃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샘 건너편에 있음.
  • 소실티고개 : 대궐터에서 내속리면 중판으로 넘어가는 고개.
  • 소실티골 : 장재저수지 왼쪽으로 세 번째 골짜기. 소실티 고개
  • 속날 : 말티고개에서 웃말 동쪽으로 내려온 산등성이.
  • 수통골 : 웃말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샘 건너 위쪽으로 술통 같이 생겼다고 함.
  • 시악시골 : 소실티골 위에 있는 골짜기. 용이 승천한 구멍이 있다 함.
  • 아래증골 : 장재 저수지 왼쪽에 있는 첫 번째 골짜기. 전에 점(점)이 있었다고 함.
  • 아홉 모랭이 : 종쟁이들 끝에 있는 거리.
  • 약물탱이 : 한각골 남쪽에 있는 약물탕.
  • 오곰장 : 독점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곰 다섯 마리가 놀았다고 함.
  • 웃 증골 : 장재 저수지 왼쪽으로 두 번째 골짜기.
  • 작은 피아골 : 큰 피아골 밑에 있는 골짜기.
  • 장재 저수지(壯才貯水池) : 장자울 북쪽에 있는 못, 1957년에 만듬. 박석티 밑에 있다 하여 박석지라 함.
  • 점골 : 점동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전에 독을 구워 팔 때 이곳에서 독을 파는 점을 쳤다고 함.
  • 점동산 : 대궐터 동북쪽에 있는 산. 점골 옆에 있음.
  • 종쟁이들 : 독점 마을 앞 들. 세조대왕이 속리산에 행차중 이 마을에 머물게 되어 아침시간을 알리는 북을 들 앞 바위에서 쳤다 하여 부른 이름.
  • 진서들 : 쌀개목 밑에 있는 골짜기. 골이 길다고 함.
  • 큰질 고개 : 웃말에서 약물탕으로 넘어가는 고개.
  • 큰 피아골 : 비구리 산골 밑에 있는 골짜기.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 째 골짜기.
  • 피아골: 말티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약초를 캐던 사람이 산삼을 캐서 배고픈 중에 한입 먹었더니 산삼에서 피가 났다 하여 피아골 이라 함.
  • 한각골 : 한각골 고개너머, 약물탕 밑에 있는 골짜기. 외속리면 구인까지 이어진다고 함.

5. 전설

  • 구름처럼 사라진 노승
    세조의 행렬이 보은읍을 거쳐 대야리 앞을 지나 속리산쪽으로 나지막한 고개를 막 올라 섰을때였다 행렬 앞에 한 늙은 중이 나타나 세조대왕 앞에 합장 제례를 드린 후 “대왕마마! 이 고개 넘어 오봉산이 있사온데 이 산 아래에 행궁(行宮-임금이 여행길에 묵는 별궁)을 지으시고 오고 가실 때 쉬어 가소서”하고는 구름처럼 사라졌다. 세조는 너무나 신기하여 노승이 말한대로 행궁을 짓게 하고 행궁 앞산에 북을 달아 아침 저녁으로 북을 쳐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도록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노승이 나타났던 고개를 미륵불이 변신하여 나타난곳이라 하여 “미륵댕이 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오봉산 아래 행궁을 지었던 자리를 “대궐터” 그리고 북을 달았던 곳을 “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미륵댕이는 현재 통일탑이 서 있는 곳에서 속리산쪽으로 가는 작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고 대궐터란 장재저수지 아래 현재 한옥 집단 취락구조 마을 이름이다.
  • 굽이 굽이 열두 굽이 말티고개
    보은을 지나 속리산으로 가면 해발 800미터의 꼬불꼬불 열두굽이나 되는 가파른 고갯길을 말티고개라 부른다. 속리산의 관문이라 하는 이 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올 때, 닭은 길이라 하며 또 조선 세조대왕께서 올 때 얇은 돌을 깔았다고 하는데 1966년 도로 포장 공사를 할 때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으로 “박석재”라고도 부른다.
    세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오실 때 외속리면 장재리에서 고갯길을 연으로 넘을 수 없어 말을 타고 고개를 넘고 나서 내속림련 갈목리 고개 밑 부락에서부터 다시 연을 바꾸어 탔다고 하여 “말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966년 말티재를 포장한 후,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
  • 효자이야기
    옛날 독점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지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는대도 어머니는 시름 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생명이 경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머니 곁에서 뜬 눈으로 병구환을 하던 아들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는데, 꿈에 신령이 나타나 내일 아침 말티고개 밑에 가면 한 중이 지나갈 것이니, 그를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 사정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말티고개 밑에 이르니 바랑을 짊어지고 막 고개를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효자는 그 중의팔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 중은 그의 청을 들은척도 않고 손을 뿌리치고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 때 어떻게 세게 중의 팔을 잡았는지 중의 팔이 떨어지게 되었다 팔이 떨어진 중은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오르다 지쳤는지 짊어지고 있던 바랑을 벗어 던지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효자는 한동안 넋을 잃고 중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잡고 있던 중의 팔을 내려다 보니 이것은 사람의 팔이 아니라 산삼이었다. 기쁜 나머지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그 산삼을 달여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이 바랑을 벗어 놓은 골짜기를 “바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개리(下開里)

1. 위치

면적 1.1㎢, 46가구 135명(1999년말), 본면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동은 봉비리(鳳飛里), 서는 장내리(帳內里), 남은 황곡리(荒谷里), 북은 서원리(書院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개안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개안 또는 하개안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점말을 병합하여 하개리(下開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개안마을 : 점말 남쪽에 있으며 냇물 갈림 안쪽에 있어 개안이다.
  • 아래개안 :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보청천에 합수하는 삼가천이 장안에 이르러 양 갈래로 동남, 서남쪽으로 분류되어 흐르고 그 가운데 섬을 이루고 있는데 장안 밑에서 갈라졌다고 하여 하개안 또는 개안이라고도 함.
  • 점말 : 등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어 생긴 이름
  • 하개안(下開安) : 아래개안

4. 기타지명

  • 등고개 : 개안에서 봉비리 새비랭이로 가는 고개로 소의 등 같이 생겼음.
  • 선창소 : 개안 남쪽에 있는 소. 비결파에 의거 전국 10승지의 하나로 송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먼저 창건하였다 하여 선창(先唱)이라 하였음. 또한 신정훈이 집을 지을 때 집자리가 배의 형국이라서 배를 댈 곳이 있어야 한다 하여 이곳에 배를 대는 곳이라 하여 선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 하개 공동묘지 : 개안 북쪽에 있는 공동 묘지

5. 문화유적

  • 선병국 고가(宣炳國 古家)
    하개리에 있는 선정훈이 지은 한옥,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1920년 경에 지음. 대지 1만여 평에 위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 여섯 동의 주건물과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99칸집이다. 대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고 담장은 토속혼축으로 와즙이며, 주건물 사이에는 담장이 있고 일각문을 내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석조기간 위에 전면 7칸의 공(工)자형 목조와 와가팔작지붕이다. 사당은 ㄱ자형으로 팔작집이고 행랑채는 J자형 팔작집이다. 대문앞에는 선씨(宣氏)의 선조 선처흠(宣處欽)과 그의 부인 경주 김씨의 효열각이 있는데 익공(翼工) 팔작집이며, 1998년 수해로 담장이 거의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영화 촬영 장소로도 유명했었다.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 13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 선병묵 고가(宣炳黙 古家)
    1940년대에 지은 건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전통적인 가옥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옆면 2칸 전・후퇴, 사랑채는 정면 4칸반, 옆면 2칸 전・후퇴를 두었다. 전체적으로 간살을 넓게 잡았고 특히 옆면에는 몸체 2칸에 전・후퇴를 두어 방을 크게Rnalf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꺽인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의 방향으로 규모가 커지고 쵯마루의 기능이 확대되는 등 1940년대의 전통적인 기법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충청북도 지방문화재자료 제 4호로 지정되었다.
  •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 행랑채 등 전통적인 가옥형태를 고루 갖춘 194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안채, 사랑채 등 각 동이 서로 독립해 있어 남부지방의 가옥배치와 유사하며 간살을 넓게 잡고 있는점이 특색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옆면 1칸에 전・후퇴간을 두었으며, 시멘트로 마무리한 기단 위에 네모나게 가공한 주춧돌을 놓고민흘림을 한 네모기둥을 세웠다. 1고주 7량으로 일반주택으로는 큰 규모이나 고주와 평주 사이에 굽어진 우미량을 설치하였다.
    1940년대 충북지방에서 전통건축기법이 계승되고 있던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충청북도 지방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다.

6. 산업

  • 담배, 고추, 쌀, 약초

7. 기타

1991년 세강터 마을 입구에 마을 자랑비를 세웠음. 옛북암초등학교 청소년 야영장이 개설 운영되고 있다.

황곡리(荒谷里)

1. 위치

면적 1.9㎢, 49가구 156명(1999년말), 본면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은 장내리(帳內里), 남서쪽은 탄부면(炭釜面), 북쪽은 구인리(求仁里)에 접하고 있다.


2. 연혁

본래는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거치실 또는 황곡(荒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황곡리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 거치실(荒谷) : 황곡 앞 들은 해마다 풍년을 이루어 황금 같은 누런 벼이삭이 춤을 춘다하여 황곡(黃谷)이라 불리어 오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고 장이 서면서 인심이 사나워지자 황곡(荒谷) 또는 거치실이라고도 함. 그러나 봉황이 날던 곳이라 하여 황곡(凰谷)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음.
  • 새터말 : 황곡리 서북쪽에 새로 된 마을.

4. 기타지명

  • 가자골(佳佐) : 웃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의 산수가 수려하여 부인들이 분 바르는 형이라 하여 가좌골이라 했던 곳이 가자골이 되었음.
  • 가자골 샘 : 가자골에 있는 샘으로 물의 양이 일정하다고 함.
  • 감나무골 : 웃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감나무가 많았음.
  • 새미재 : 중간말에서 탄부면 상장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 고을 원님이 남녀를 타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남여재라 하던 것이 변하여 새미재가 됨.
  • 동고개 : 아랫말에서 탄부면 상자리 지디기로 가는 고개.
  • 말탐바우 : 빈경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하나 바위가 얹혀 있음.
  • 웃골 : 중간말과 웃말 사이에 있는 골짜기.
  • 웃골 고개 : 웃골에서 탄부면 평각리 돈논으로 가는 고개.
  • 장판골 : 웃골과 한자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 한자골 : 아랫말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은 고을터로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환자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한자골이 되었음.
  • 허재비골 : 가자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원이 있을 때 이곳에서 소를 잡아서 소잽이골이라 하던 것이 허재비골로 변한 것임